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충청도 사람이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서 수학하였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 당시 서울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하얼빈으로 망명하여 러시아인이 운영하던 공업대학(工業大學)에 다니면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였으며, 1935년에는 중국 남경(南京)에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고 공산주의자전위동맹(共産主義者前衛同盟)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1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성자(星子) 강릉분교(江陵分校)에 입학하여 1938년 5월 졸업한 후 조선민족혁명당 제3차 임시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6월 조선민족혁명당 간부진의 관내(關內) 안주노선(安住路線)에 반발하여 탈당하였다. 최창익(崔昌益) 노선 지지자들과 함께 무창(武昌)에서 한구(漢口)로 이동하여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 약칭 戰時服務團) 결성에 참여하고 동 단체 간부로 중국군의 시내 경비에 협력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 소속원들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제2구대 정치지도원으로 낙양(洛陽) 일대에서 항일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가 화북(華北) 팔로군(八路軍) 지역으로 이동하자, 조선의용대 제1구대 제1전구 사령부에 배속되어 정치공작대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산하 의용대(義勇隊)의 김무·고생호 등과 함께 북경(北京)으로 잠입하여 한인주점을 경영하면서 대원 모집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1941년 6월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진찰기분회(晉察冀分會) 선전위원으로 활약하였고 이듬해 5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참여하여 제1지대장 김원봉(金元鳳) 산하 제1구대 분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42년 8월 병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780面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403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687·717·748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941面
- 解放日報(1942. 8. 27)
- 關內地區朝鮮人反日獨立運動資料 編 下冊(1919∼1945) 135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6卷 374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