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황해도 연백(延白) 사람이다.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적후방에서 공작 중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386·408면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91 | 훈격 |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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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연백(延白) 사람이다.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적후방에서 공작 중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하였다.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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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김성률 | - | 황해도 연백(延白) | - | |
본문 |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출신으로 1920년 4월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 경위는 미상이다. 1940년 초 광복군 제2지대에 들어가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제2지대의 입대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한 후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린펀(臨汾), 허베이성(河北省) 스자좡(石家莊) 등 일본군 점령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 광복군 모집, 일본군 와해를 위한 선전 및 첩보 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중국 유격대와 협조하여 유격전에도 참전하였다.
1943년 9월 산시성 남부에 있는 타이항산(太行山) 링추안(陵川)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하였다. 링추안은 중국 국민당 제34집단군, 공산당 팔로군 제2종대, 일본군 제36사단 등이 허베이성, 산둥성(山東省), 허난성(河南省) 등 화중(華中)지역을 장악하려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또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전지공작대)가 병력 모집, 일본군 정보 수집 등의 공작 활동을 전개한 주요 지역이기도 하였다. 모집한 병력 중 일부는 시안(西安) 전지공작대 본부로 후송되었고, 일부는 남아 중국유격대와 함께 공작 활동과 유격전에 가담하였다. 이후 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 제2지대로 재편되는 과정 속에서도 링추안 일대에서의 공작 활동은 계속되었다.
유해는 동지들이 수습하고 있다가 광복 후 귀국하면서 봉안해 왔고, 1967년 서울 수유리의 광복군 합동묘소에 모셔졌다. 당시 봉안해 온 광복군 유해 중 유족이 있는 분들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18위는 수유리의 광복군 합동묘소에 묻혔다. 현재 묘소는 서울 북한산 순국선열묘역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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