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1944년 9월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지구(長沙地區)에 주둔 중 광복군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1944년 12월에 일군(日軍)을 탈출하였다. 1945년 4월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土橋隊)에 입대한 바 있어 종전 무렵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국군으로서의 특수임무를 수행한 사실이 확인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자을 수여하였다.
관리번호 | 8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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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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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光洙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본적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91 | 훈격 |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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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지구(長沙地區)에 주둔 중 광복군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1944년 12월에 일군(日軍)을 탈출하였다. 1945년 4월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土橋隊)에 입대한 바 있어 종전 무렵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국군으로서의 특수임무를 수행한 사실이 확인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자을 수여하였다.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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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김광수 | - | 전라남도 무안(務安) | - | |
본문 |
1924년 4월 19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자은면(慈恩面) 고장리(古場里)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본에 강제 징병되어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지구에 배치받았다. 후난성 창사 일대는 1939년 9월부터 1944년 6월까지 4차에 걸친 창사회전(長沙會戰)을 치렀던 곳으로 늘 전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1944년 11월부터 일본군은 중국의 임시 수도 충칭(重慶)을 점령하기 위한 침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며, 중국군 역시 이에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이렇게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많은 한인 사병이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고 있었다.
1945년 2월 이용상(李容相)의 도움으로 일제를 위한 무의미한 죽음보다는 조국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부대를 탈출하였다. 이용상 역시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창사 남방 지구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5월 탈출하였다. 이후 중국 중앙군 형산(衡山) 유격사령부에서 특수공작의 임무를 담당하여 활동하면서 일본군 내 한인 사병들의 탈출을 도와 광복군에 입대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용상의 도움으로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한인 사병으로는 강재식(姜在植)·황의선(黃義善) 등이 있다.
1945년 4월경 죽음을 무릅쓰고 행군을 계속해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 도착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에 도착하여 5월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였다. 모두 3기가 운영된 토교대에 제3기로 들어갔다. 당시 3기는 1945년 5월경 중국군에 포로로 잡힌 한인 사병과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사병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토교대에서 약 3개월의 교육 훈련 과정을 마치고, 광복군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8·15 광복 당시의 토교대 대부분은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어 환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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