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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08
성명
한자 金承學
이명 金鐸, 號:希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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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62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1년 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19년 임시정부 독립신문 총경리(臨時政府獨立新聞總經理)

2. 1926년 임시정부(臨時政府)의 명령으로 참의부(參議府) 참의장(參議長)이 되어 일본 경찰(日本警察)의 공격을 받아 소멸(消滅) 직전(直前)에 있던 참의부(參議府)를 재건

3. 1928년 중국(中國) 몽강현(濛江縣)무관학교(武官學校)설치(設置)하여 군사(軍士) 200명(二百名) 양성(養成)

4. 참의부(參議府) 기관지(機關志)‘정로’(正路)발행(發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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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안북도 의주(義州) 사람이다.

24세 이후 상경하여 한성고등사범학교(漢城高等師範學校)에 입학, 신학문을 익혔다. 1907년 정미(丁未)조약체결 때 서울 종로에서 반대연설을 하다가 평리원(平理院) 구치장에 3개월간 유치 당하기도 하였다.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강무당(奉天講武堂)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의병 투쟁에도 가담하였다. 1919년 음력 3월 15일 각계 각층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할 때 이에 참여하였다. 동시에 임시정부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국내 특파원으로 백의범(白義範) 백기준(白基俊)과 같이 국내에 들어와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였고 88개소에 독립단 지단(支團)을 설치 운영하였다. 그는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0년 2월에는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사령부 군기국장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1921년에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장이 되어 민족정기를 앙양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경주하였다.

이때 그를 도운 독립지사는 안창호(安昌浩) 이영렬(李英烈) 신우현(申禹鉉) 장기초(張基礎) 등이었다. 또한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던 세계 혁명단체대표자 대회에 임시정부 군무부군단을 대표하여 참석하고 "우리의 독립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며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나라들이 속속 독립을 선포하는 차제에 우리만이 계속 피압박 상태 속에 놓여 있음은 언어도단이다. 속히 대한의 독립이 실현되길 기대한다"고 하면서 각국 대표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한 바 있었다.

이에 그곳에 참석한 수많은 대표가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통일하는 문제에 상당히 접근하였었다고 전해진다.

1922년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선전부장에 취임하여 양국간의 친선을 도모하였으며 임시의정원의 평안도의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는 참의부(參議府) 성립을 위하여 이유필(李裕弼)과 함께 남만에 파견되어 활동하였으며, 1924년에는 임정의 학무부차장이 되어 학무부총장의 직무를 대행하였다.

1926년 임정의 명으로 육군주만 참의부의 참의장(參議府參議長)이 되어 재건운동에 힘썼다.

그것은 전참의장 최석순(崔碩淳)이 고마령전투(古馬嶺戰鬪)에서 동지 28인과 같이 장렬히 전사하였으므로 후임이 되어 참의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참의부의 기구를 5위(五委) 7행정구(七行政區) 5중대로 크게 개편 정비하고 각 행정구마다 50명 이상의 경호대원을 양성하여 지방자치에 만전을 기약하면서 임시정부를 외곽에서 지원하였다. 동시에 교육기관은 각 행정구마다 소학교 3개교 이상을 세우고 중학교육은 중국 중학교에 한인과(韓人課)를 두어 수학하기로 중국 당국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 뒤 길림성(吉林省)에서 3부(참의부 정의부 신민부)통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그는 참의부를 대표하여 박창식(朴昌植) 등과 같이 참석하고 각지 대표 25인이 5개월을 두고 협의한 끝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군민의회(軍民議會)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는 군민의회의 민사위원(民事委員)에 취임하고 한국독립당(위원장 홍 진)의 최고 간부를 겸하게 되어 모든 진용을 구비하고 본영으로 귀대하던 도중에 통화현(通化縣)에 대기하고 있던 중 일(中日)군경합동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항거하다가 체포되었다.

그 뒤 신의주 평양 등 감옥으로 전전하며 옥고를 치르고 5년 만인 1934년 3월에 출옥하였다. 그는 출옥한 뒤에도 독립운동을 위한 굳은 뜻을 굽히지 않고 북경(北京)을 거쳐 남지(南支)방면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69 481 1088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46 453 474 491 495 503 504 518 535 538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81면
  • 동아일보(1934. 3. 26 字)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7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7 307 411 723 72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64 267 459 463 578 669 69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72 39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8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11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82 189 20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61 254 257 258 259 266 274 275 291 347 359 399 417 42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4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31 15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승학 자 : 우경(愚卿), 호 : 희산(希山), 이명 : 김탁(金鐸) 평안북도 의주(義州) -
본문
1881년 7월 12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枇峴面) 마산동(馬山洞) 동상곡(東上谷) 신보라(新保羅) 절골에서 아버지 덕린(德麟)과 어머니 강릉 최씨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배천(白川)이며, 자는 우경(愚卿), 호는 희산(希山)이고, 이명은 김탁(金鐸)이다. 1896년 김내정(金迺貞)과 혼례를 치러 3남 1녀를 두었다. 조부 때에 가산을 소진하여 유년기에 소작농 생활로 연명하였다. 1890년 10월 고향 마을에 있는 조산재(造山齋)에 들어가 1897년까지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9년 화서학파 조병준(趙秉準)이 가르치는 의주군 월화면 진음동 소재 증곡재(曾谷齋)에 입학하였다. 1900년 (음)3월 15일 증곡재에서 운암 박문일 제사 후 조병준과 노유(老儒) 장원섭(張元燮)이 시국을 통탄하며 거의(擧義)를 독려하는 강의를 듣고 서간도 망명과 항일운동을 결심하였다. 같은 해 10월 초 서간도를 시찰하고 이듬해 3월 귀국하였다. 1904년 8월 상경하여 한성고등사범학교(漢城高等師範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다가 1905년 9월 자퇴하고 귀향하였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서울 종로에서 배일 연설을 하다가 평리원(平理院) 구치감에 3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같은 해 8월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현면 면감(面監)으로 활동하였고, 9월 의주 극명사범학교(克明師範學校) 교감으로 근무하였다. 1909년 1월 말 융희황제(순종) 서순(西巡) 당시 신의주와 의주에서 일장기 게양반대운동을 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이틀 동안 악형을 받았다. 같은 해 명의학교(明義學校) 교사로 취임하였으나, 10월 26일 안중근 의거 직후 일제 경찰이 의거와 연관성을 의심하고 계속 위협하는 바람에 망명을 결심하였다. 1910년 10월 만주 랴오닝성(遼寧省) 판산현(盤山縣)으로 망명한 뒤 1912년에 김탁(金鐸)으로 이름을 바꾸고 펑톈성(奉天省) 관립 강무당(講武堂) 속성과에서 6개월 간 군사교육을 받고서 의병단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1919년 전후 중국·러시아로 망명한 평안도 출신 박문일·유인석 등 문인들은 각기 자치기관 겸 항일단체인 의병단(義兵團)·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3월 15일을 기하여 독립전쟁과 자치를 목적으로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浦) 시거우(西溝) 다화셰(大花斜)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단 「통칙」 3조의 기관 설치 전략에 따라 1919년 8월경 백의범·백기준·신우현 등과 함께 국내 지단 설치를 위해 1차로 국내로 특파되었다. 이때 직함은 대한독립단 겸 대한민국 임시정부 평북독판부 특파원이었다. 1차 특파원들과 함께 임시정부 연통제 30처, 대한독립단 지단 59처 등 모두 89개 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 중 평북에서 평남,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52개 조직을 설치하였다. 1920년 3월 대한독립단 총재부 박장호·전덕원이 ‘기원파(紀元派)’ 독립단을 조직하면서 총단부를 ‘민국파(民國派)’로 지칭하면서 총재부와 총단부가 양분되었다. 이에 ‘민국파’ 독립단은 콴뎬현(寬甸縣)에서 조병준을 총재로, 신우현을 단장으로 하여 분립하였다. 이때 민국파 독립단에서 재무부장을 맡았다. 1920년 4월 3일 남만주 통일기관 명칭 승인 및 무기 구입 차 상하이(上海)로 출발하여 8월 10일에서야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로 인가를 받고 군정국장(軍政局長) 겸 군기국장(軍機局長, 또는 軍需局長)에 임명되었다. 통일기관의 이름으로 광복군사령부와 함께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 명칭을 받았는데, 광복군참리부는 내무부 직할로 서간도 한인동포 통치 사무 일체를 관할 지도하는 기구였다. 상하이에서 무기 240정과 탄환 수만 발을 구입하고, 구사일생으로 9월 26일경 콴뎬현으로 귀환하여 사령부 주둔처인 수혈립자(水穴砬子)에서 사령부 소속 군인들에게 무기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광복군사령부 군인들은 이 무기로 국내에 진격하여 일본 군경과 교전해 95명 사살 등 큰 전과를 세웠다. 1921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으로 경영을 맡았고, 박은식을 주필로 삼아 1924년까지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독립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1921년 10월 말 러시아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상하이를 떠나 이르쿠츠크로 가는 여정에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소식을 듣고, 이르쿠츠크에 가서 독립군의 비참한 집단수용 실상을 목격하였다.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독립신문사 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1922년 8월 27일 상하이에 대종교 서이도본사(西二道本司)가 설치되고, 9월 3일 박은식이 전리(典理)에 임명되었다. 같은 날 대종교에 입교하여 영계(靈戒)와 참교(參敎) 교질(敎秩)을 받았다. 1923년 3월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선전부장에 선출되어 양국 간 친선을 도모하였다. 같은 해 1월 15일 대종교의 주요 경전인 『종경(倧經)』을 펴내고, 9월 20일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의 저술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편수 겸 발행자로서 출간하였다. 이후 북간도 동흥학교 등 여러 민족학교에서 『신단민사』를 역사교과서로 채택하였다. 1924년 4월 임시의정원 평안북도 대표의원, 5월 26일 학무부 차장, 5월 31일 학무부 총장 대리로 선임되어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10월 4일자 『독립신문』에 채찬(백광운) 암살을 질타하는 대한통의부 성토문을 게재하였다. 이에 11월 통의부를 비롯한 8개 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반발하자, 임시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내몽골 바오터우현(包頭縣)에 이주한 스승 조병준을 찾아가서 임시정부 직할 단체인 의민부(義民府)의 총무부장을 맡았다. 대한통의부의 분열로 1924년 5월에 결성된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參議府) 제3대 참의장 윤세용의 뒤를 이어 1927년 10월 제4대 참의장(參議長)에 임명되어 참의부 재건과 남만 독립군 단체의 통합에 주력하였다. 참의부 중앙부서 개편과 함께 본부를 환런현(桓仁縣) 얼펑뎬쯔(二棚甸子)로 옮기고 교민 자치를 우선시하는 자치기관으로 발전시켰다. 1928년 초 멍쟝현(蒙江縣)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양성에 노력하는 한편, 기관지 『정로(正路)』를 발행하여 선전 활동에도 힘썼다. 1928년 7월 정의부의 3부 통일회의 개최 제의로 9월 지린성(吉林省) 신안둔(新安屯)에서 3부 통일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참의부를 대표하여 김소하·김강(박창식)과 같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지연되어 11월에 개최되었으나 끝내 성과 없이 해산하고 말았다. 3부 통일운동이 결렬되자 신민부와 참의부는 다시 대표자 연합회를 열고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2월 하순 김좌진(金左鎭)이 이끄는 신민부 군정위원회 측과 정의부의 김동삼·지청천 계열을 규합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 일명 군민의회)를 결성하고, 민사위원장(民事委員)에 선임되었다. 1929년 2월 5일 혁신의회 회의를 마치고 귀대하다가 군무위원 박창식과 함께 환런현 와니전자(蛙泥甸子)에서 펑톈총영사관 퉁화(通化)분관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3월 3일 신의주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고 3월 16일부터 신의주 구치감 제18호실 독방에서 14개월 미결수로 있다가, 평양 암정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5년 만인 1934년 3월 22일 출감하였다. 1937년 5월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재중국 북경비밀기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11월 4일 비밀 활동 사실이 탄로나 경찰의 추격을 피해 한커우(漢口) 등지로 피신하였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환국하여 신의주에서 동지 10여 명과 독립운동사편찬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사 편찬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9월 하순 서울에서 오광선·전성호·김석황 등과 한국혁명군을 조직하였고,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의 지시로 이를 광복군 국내 제1지대로 개칭하고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11월 국내 제1지대를 사퇴하였으나 김구 주석의 부탁으로 개성에서 광복군 국내 제2지대를 설립하고 청년 수백 명을 훈련하던 중 1946년 미 군정청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1946년 『독립신문』을 속간하였으나 1949년 7월 6일 공보국의 명령으로 폐간 당하였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다가 1947년 6월 26일부터 1주일 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임시정부 환국 후 1947년 4월 국무위원에 임명되어 정치부장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49년 6월에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친일파 명단인 『친일파 군상(親日派群像)』을 작성하였다. 1949년 1월 3일 대종교 총본사의 행정책임자인 전리(典理)를 맡아 1개월간 시무하였다. 1953년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1956년 2월 5일 사단법인 애국동지원호회(대표 문일민) 주관으로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65년 유고집 『한국독립사』로 증보·발간되었다. 저술로는 『친일파 군상』(1948),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1956), 『망명객행적록(亡命客行蹟錄)』(1958), 『배달족이상국건설방략(倍達族理想國建設方畧)』이 있다. 1964년 12월 17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 자택에서 타계하였고, 유언에 따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부근에 묻혔다. 2012년 5월 3일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495)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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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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