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20년 중국으로 건너가 쓰촨성(四川省)의 성도군관학교(成都軍官學校)를 수료하였다. 이후 산시성(陝西省) 시안에서 중국군에 소속되어 중교(中校)로 참모의 직책을 맡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9년 11월 중국 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군사특파단은 중국 화북(華北)지역 한인 청년들의 초모활동과 군사거점 마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 교두보를 마련한 것으로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김자동은 군사특파단 파견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 입단하였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 국군이었다. 김자동은 1941년 2월 한국광복군 징모(徵募) 제1분처 주임인 이준식(李俊植)의 인솔로 산시성(山西省) 방면으로 진출하여 군사 초모(招募) 활동을 벌였다. 이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의 직제가 개편될 때 상교(上校)로서 서무과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8월의 직제 개편에서는 총사령부 제3과장에 선임되었으며 1944년 3월 총사령부 고급참모로 활동하였다. 1945년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중국 군사위원회가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의 중앙군사학교에 한국 청년들을 입교시킬 계획을 추진할 때 총무를 담당하였다.
한국광복군을 통한 군사활동 외에도 김자동은 정당에 소속되어 독립운동과 독립 후의 국가 건설을 위한 기초를 닦는데 힘썼다. 1943년 3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중경시 제4구 집행위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이듬해인 1944년 2월에는 동 당의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활동 방략에 대한 이견으로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동년 12월 유동열(柳東說) 등과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朝鮮民族革命者統一同盟)을 조직하고 간사에 선임되었다. 1945년 3월에는 홍진(洪震) 등과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신한민보(新韓民報)(1941. 3. 20, 1943. 9. 16)
- 독립신문(獨立新聞)(1943. 6. 1)
- 국민보(國民報)(1943. 9. 1)
- 임시정부각부원직원일람臨(時政府各部院職員一覽)(민필호, 1941. 3. 15)
-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1971) 제1권 314면
-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1971) 제2권 189, 19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제7집 1112면
-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1994) 제27권 30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5) 제6권 65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9권 62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11권 194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13권 178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9) 제34권 65, 199, 203, 209, 360~361, 364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9) 제37권 158, 277, 311, 323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제6권 219, 272, 274면
- 「남파 박찬익 연구」(이연복, 국사관논총, 국사편찬위원회, 1990) 15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