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9월 중앙고등보통학교 (中央高等普通學校) 제3학년 재학시 이병립 (李炳立) 이천진 (李天鎭) 등과 조선사회과학연구회 (朝鮮社會科學硏究會) 를 창립하였으며 1926.6.10 순종황제 (純宗皇帝) 의 국장일 (國葬日) 을 맞이하여 1919년 독립만세운동과 같은 거사를 일으킬 것을 목적으로 만세기 (萬歲旗) 격문 (檄文) 등을 제작하여 연도 (沿道) 에 도열 (堵列) 하고 있는 참예 군중 (參詣群衆) 에게 살포하며 대연 (大輦) 이 통과될 때 독립만세를 선창 연창하다가 피체 되어 주동자로 징역1년(미결 (未決) 60일통산 (通算) )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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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25년 9월 27일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중에 항일단체인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그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들은 기관 잡지 「과학운동」을 발행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6년 4월 26일 그는 융희황제의 서거 소식을 듣고 이 단체 회원 및 동료 학생들과 만세시위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격문 1천여매, 태극기 30여개를 제작하고 동년 6월 10일을 기하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드디어 융희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서울 시내의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으며, 그는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대여(大輿)가 지날 때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군중과 학생들을 지휘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경의 무자비한 검거로 그는 무수히 매를 맞고 붙잡혔으며, 학교에서는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는 결국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27년 9월 20일에 만기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26. 11. 17 경성지방법원)
- 판결문(1927. 4. 1 경성복심법원)
- 고등경찰요사 292·23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6·237면
- 기려수필 377∼380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176·180·307·308·429·54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3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576·67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160·43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72·174·184·190·192·194·197·200·203·206·209·210·218·220·221·222·224·227·231·1436·1484∼14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336·354·355·364·367·37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