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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3월 10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평계리(坪溪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향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였으며, 그 해 3월 27일 옥천군 이원면 이원장터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3월 27일 옥천군 이원면 이원장터 만세시위는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가 귀향한 육창주(陸昌柱)·육창문(陸昌文)·허상구(許相球) 등 수묵리(水墨里) 인사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서울에 체재하고 있던 10일 동안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논의될 것이라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육창주·육창문·허상구는 귀향하자마자 만세운동 준비를 서둘렀다. 허상구는 서울에서 경험한 만세운동과 이원면 만세운동 계획을 부친 허훈(許訓)과 친형 허상기(許相基)에 알려 그들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허상기는 만세운동을 함께 준비하기로 하였다. 육창주는 같은 마을에서 평소 교류가 깊었던 친구 김용이(金龍伊)를 동지로 규합하였다.육창주 등은 3월 15일 육창문의 집에서 만세운동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비밀모임을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만세운동 거사일을 이원장터 장날인 3월 27일로 결정하였다. 또한 만세시위에서 참여하지 않는 주민이 있다면 강제로 참여시키고, 만약 헌병이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제지한다면 모두 헌병주재소로 이동할 것, 또 구금자가 발생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구금자를 탈환할 것, 그것이 불가할 때는 헌병대 앞에서 해산하지 않을 것 등을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육창주는 곧바로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던 광목으로 만세시위에서 사용할 대형 태극기 3본과 ‘독립만세’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제작하였다.만세운동이 거사일인 3월 27일 오후 1시 육창주와 허상기는 깃발을 들고 시장의 동쪽과 서쪽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장날의 장터에 나온 주민들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후 육창주 등은 주변의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의 행동에 공감한 수백 명의 주민들이 구호에 호응하여 일제히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이날 오후 이원장터로 가는 도중 만난 장꾼으로부터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원면에서도 만세시위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너무도 반가워 곧바로 동참을 결심하고, 서둘러 장터로 가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육창주 등의 지휘에 따라 이원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만세시위가 발생하자 곧바로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고압적인 자세로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다. 육창주 등이 지휘하는 시위대는 이미 사전에 결정한 행동지침대로 헌병대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계속하여 시위를 전개할 의사를 표명하였다.일제 헌병들은 곧바로 총검을 들이대며 태극기를 압수하고, 만세시위의 주도 인물인 육창주와 허상기를 체포하여 헌병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김용이 등의 지휘에 따라 헌병주재소로 쫓아가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헌병대는 육창주·허상기를 석방하라는 만세시위대의 요구에 불응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위대를 향해 총기 발포로 대응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강력하게 항의하던 이일만(李一萬)의 동생이 총탄에 피격되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이에 시위대는 일단 철수하였으나, 오후 3시 이일만이 죽은 동생의 유해를 주재소로 운구하여 항의함에 1,0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항의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헌병들이 여전히 무력으로 만세시위를 탄압하고자 하자, 시위대 선두에서 김수원(金壽遠)·차기시(車奇矢) 등과 함께 헌병주재소에 대한 공격을 지휘하였고 솔선하여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다른 주민들과 함께 몽둥이 등으로 일제 헌병을 구타하고, 주재소 안의 유치장 담벽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육창주와 허상기를 구출하였다.이처럼 이원장터의 만세시위가 격렬한 시위로 발전하여 이원의 헌병대 병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일제는 옥천읍(沃川邑)과 대전(大田)에서 지원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이원에 도착하자마자, 만세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발포로 대응하며 만세시위를 해산시키고, 주동인물들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군경의 총탄에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상당수 주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일제 헌병에게 만세시위 주동인물로 지목되어 육창주·허상기·김용이 등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1919년 5월 5월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일부 취소 후 동일한 형량인 징역 2년을 받았다. 다시 “본인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한 의사발동이었으므로 범죄가 될 수 없다”는 취지로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옥고를 겪던 중,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과 열악한 감옥 환경 등으로 인해 1920년 11월 2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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