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그는 고향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조선일보 부여지국의 기자와 부여청년회(扶餘靑年會) 문예부장을 지냈다. 이후 대왕의숙(大王義塾)을 개설하여 남녀아동에게 한글을 교육하는 한편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점차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그는 강성구(姜星求) 등의 동지와 함께 1931년 비밀결사 화성당(火星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이호철(李戶喆)이 경영하는 중앙일보 부여지국의 총무 겸 기자로 근무하였다.
1931년 봄 이호철·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부여군 홍산면(鴻山面)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이후 전영철(田泳哲)·강도형(姜道馨)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마정리(馬井里)·금송리(今松里)·조현리(鳥峴里)·장하리(長蝦里)·중정리(中井里) 등의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고 농촌의 청소년들에게 한글·산술 등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들은 또한 1933년 7월 부락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위장·조직하고 항일농민운동에 힘쓰던 중 동년 8월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붙잡힌 지 2년 만인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6년 5월 21일 공주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9면
- 동아일보(1935. 11. 1)
- 경성일보(1933. 12. 9)
- 사상휘보 6호 215∼2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