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단(處斷) : 결단을 내려 처치하거나 처분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상북도 대구(大邱)에서 태어났다.
1909년 신민회 계열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안희제(安熙濟) 이원식(李元植) 남형우(南亨祐) 이시열(李時說)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에 망명하여 부민단(扶民團)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 1운동 후 서간도의 독립군단체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이에 참가했으며,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을 때에는 김동삼(金東三) 이진산(李震山) 등과 함께 서간도 독립군단체 대표로 참석하여 국민대표회의 비서장(秘書長)에 선임되었다.
1925년 1월에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正義府)를 이청천(李靑天) 이관일(李貫一) 이종건(李鍾乾) 고활신(高豁信) 양세봉(梁世奉) 등 동지들과 함께 조직하여 그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7년 11월에 상해에서 각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 各地代表聯合會)가 개최되자 정의부의 대표로 이에 참석하여 독립운동단체들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후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동지들과 함께 조직했다가 1934년에 남경(南京)에서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립하고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5년 7월에 남경에서 의열단(義烈團), 상해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등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창립할 때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일본의 중국침략으로 중 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방송국을 통하여 일본본토에 대한 일본어방송과 한국본토에 대한 한국어방송을 맡아서 매일 각각 15분씩 「일본민족에게 고함」 또는 「조선민중에게 고함」과 같은 방송을 계속하고 일제 강점 후 한국인의 생활의 영락을 폭로하며 이번의 중 일전쟁에 임하여 해외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민족혁명당과 통합되어 중국과 협력해서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투하고 있다고 방송하면서 국내의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일제에 대한 비협력과 각종 형태의 독립운동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년감 200 179면
- 고등경찰요사 90, 101, 108, 109, 110, 111, 224, 226, 232, 23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 36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17, 605면
- 기려수필 258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276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32, 145면
- 벽옹 김창숙 일대기 19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483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97, 303, 304, 305, 306, 307, 308, 313, 316, 565, 567 619, 64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52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34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