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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96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 재판 당시 23세였으며, 직업은 포목상(布木商)이라고 법정에서 밝혔다. 당시 주소는 평안북도 신의주부(新義州府) 진사정(眞砂町)(현 평안북도 신의주시) 6정목(六丁目)이었다.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1920년 9월 18일 평북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진음동(秦音洞)에서 의주군 고관면(古館面) 이화동(梨花洞)으로 돌아오던 중 단원이었던 한이경(韓利敬)의 권유를 받아 대조선독립보합단(大朝鮮獨立普合團)(이하 보합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보합단은 1920년 5월 김동식(金東植)과 김시황(金時晃)(일명 (金仲亮))·백운기(白雲起)·안효준(安孝俊) 등이 의주군 비현면(枇峴面)에서 대조선청년결사대(大朝鮮靑年決死隊)를 확대·개편하여 조직한 무장독립운동 단체였다. 단장은 김시황이고, 총무는 김동식이었다. 산하에 재무부(財務部), 소모부(召募部), 교통부(交通部) 등을 설치하였다.보합단은 결성 이후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처단, 일제 관공서 파괴 등을 목표로 활동하며, 동지 규합에 힘써 1920년 말에는 단원이 50여 명에 달하였다. 보합단은 그 해 6월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근거지를 의주군 비현면에서 고관면(古館面) 동암산(東岩山)으로 옮기고, 의주군과 용천군(龍川郡), 철산군(鐵山郡), 선천군(宣川郡) 등지의 10여 개 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보합단이 1920년 한 해 동안 모금한 군자금은 현금 11,800원과 어음 등을 포함해 25,810여 원에 달하였다.1920년 9월, 보합단은 다시 근거지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산면(山面) 내산동(內山洞)으로 옮기고,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백운기와 김동식이 이끄는 2개 대로 나누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때 김동식이 이끄는 제1대에 소속되어 선천군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처단 투쟁을 전개하였다.같은 해 9월 22일 백운기·심창숙(沈昌淑)과 함께 지역에서 친일파로 유명했던 의주군 비현면(枇峴面) 당후동(堂後洞)에 거주하고 있는 이성춘(李成春)에게 군자금 100원을 징수하였다.그리고 김중량(본명 (金時晃))·심창숙·김내찬(金迺贊)·김흥도(金興道) 등 보합단원 10여 명과 함께 논의한 결과, 의주군 비현면 정산동(亭山洞)에 거주하고 있던 일제 순사 출신의 밀정 문치무(文致武)를 처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9월 29일 문치무의 집을 습격해 사형선고장을 제시한 뒤 처단하고, 집을 불태웠다. 9월 30일 백운기 부대와 합류하여 22명의 대원과 함께 철산군 참면(站面) 이응동(二鷹洞)에서 도참사 오희원(吳熙源)의 집을 습격하여 엽총과 탄환 20발을 빼앗았다.10월 2일에는 선천군 산면 신풍동(新豊洞) 산중까지 추격해온 일본 경찰 수색대와 교전 끝에 적병 2명을 사살하였으나, 단원 3명이 전사하였다. 이때 단원 백운기가 일제 경찰 수색대에게 붙잡혔다.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보합단은 일부 단원들만 국내에 잔류시키고 본부를 중국 콴뎬현(寬甸縣)으로 옮겼다. 본부를 만주로 이전한 후 보합단은 1920년 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합류하며 독립군 부대로 전환하였다. 당시 안둥현(安東縣) 싼다오거우(三道溝)에서 중일 군경에 포위되어 장시간에 걸친 악전고투 끝에 적병 5명을 사살하였으나, 단원 3명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렀다. 1921년 3월에는 압록강 하류 접리구(接梨溝) 부근에서 일제 경찰 부대와 접전을 벌였다.대한독립단에서 심창숙·김내찬·김흥도 등과 함께 파견원으로 임명되어 1921년 초 국내로 다시 잠입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1920년 친일파 문치무 처단 등의 활동이 드러나 1921년 6월 6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강도, 살인, 방화 등으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21년 9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 해 11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1922년 2월 2일 동지 김내찬·김흥도·심창숙과 함께 평양감옥에서 사형 당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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