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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33
성명
한자 金正翼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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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3. 21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지(泉旨)장날의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 거사(擧事)주동자(主動者)로서 손영학(孫永學)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大韓獨立萬歲)(旗)를 만들고 400여명(餘名)시위 군중(示威群衆)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 연창(連唱)하면서 길안면사무소(吉安面事務所)경찰 주재소(警察駐在所)로 몰려가서 투석(投石)으로 맞서 건물(建物)파괴(破壞)하며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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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길안면 천지(吉安面泉旨)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고 손영학(孫永學)·김정연(金正演)·장두희(張斗熙) 등과 협의한 끝에 3월 21일 천지 장날을 거사일자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일인 3월 21일 아침 일찍 그는 손영학·김정연 등과 미리 제작해 둔 태극기와 장터에 나아가 광목을 사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만들고 시위군중이 모여들기를 기다리다가 오후 5시경, 4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천지 장터의 중앙부근에 독립기와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시위군중이 이에 호응하자 그는 오후 6시경, 4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길안면 면사무소로 달려가서 면장·면서기들에게도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주재소 경찰이 들어가는 것을 제지하자, 그는 격분한 시위군중과 함께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창문 등을 파괴한 후 다시 장터로 돌아와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손영학·김정연 등과 함께 주재소 습격을 제의하자 시위군중이 일제히 호응하므로 그는 오후 9시경,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시위행진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손영학·김정연과 함께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일본 경찰의 제지를 받자 돌을 들어 대항하니 시위군중도 일제히 투석으로 주재소의 유리창과 창문 등을 파괴하였다. 이날 밤 자정경에 이르러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 경찰이 최후의 수단으로 야만적인 발포를 감행하자 시위군중은 부득이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의 검거가 시작되자 그는 손영학·김정연과 함께 피신하였으나, 1920년 2월 11일 의성읍(義城邑) 박재하(朴在夏)의 집으로 가서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로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1920년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20. 5. 21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00·401·40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64·136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정익 - 경상북도 안동(安東) 안동군 길안면 만세운동
본문
1891년 5월 16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오대리(梧垈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919년 안동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안동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3일 안동면(安東面)에서 일어난 이상동(李相東)의 1인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3월 27일 풍남면(豊南面) 하회동(河回洞) 만세시위에 이르기까지 안동에서는 모두 14회에 걸쳐 10,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3월 17일부터 23일까지가 절정기였다. 안동군 19개 면 중에서 11개 면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안동의 만세시위는 3월 18일 낮까지 비교적 온건한 시위 양상을 보였으나, 이날 밤에 일어난 안동면의 두 번째 시위부터 공격적인 시위 양상이 나타났다. 이후 안동의 만세시위 과정에서 면사무소 5곳과 주재소 3곳이 부서졌다.이처럼 만세운동의 열기가 고초되어갈 때 임하면 오대동에 사는 마을 주민들과 뜻을 모아 시위 준비에 나섰다. 거사일은 길안면에 있는 천지시장(泉旨市場) 장날인 3월 21일로 정하였다. 오대동은 행정구역으로는 임하면에 속하지만, 거리로는 길안면이 더 가까웠다. 그래서 거사 장소로 길안면 천지시장을 선정한 것이었다.1919년 3월 21일 김정연·손영학과 아침 일찍 천지시장에 가서 당목(唐木) 천을 사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을 만들었다. 오후 5시쯤 천지시장 한 가운데서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 오후 6시쯤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김정연·손영학과 함께 면사무소로 들어가려 하자 스기모토(杉本) 순사가 가로막았고 이에 시위대와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출입문을 부수었다. 시위대와 다시 길안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졌다. 3월 21일에는 길안면만이 아니라 임동면(臨東面)과 임하면에서도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서류와 비품을 파기하는 투쟁이 이어졌다. 3월 22일 오후에 다시 수백 명의 시위대가 길안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시위하였다.이후 며칠 동안 검거 선풍이 있었는데, 3월 24일에는 손두원(孫斗源)이, 3월 26일에는 김필락(金珌洛)이 순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김정연·손영학과 함께 피신하여 의성군(義城郡) 의성면(義城面)에 있는 박재하(朴在夏)의 집에서 숨어 지내며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갈 여비를 마련하던 중 1920년 2월 11일 붙잡혔다.1920년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보안법 위반, 강도예비로 징역 5년을 받고 항소하였다. 그 해 6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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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강도예비 징역 5년 대구지방법원 1920-05-2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강도예비 공소 기각 대구복심법원 1920-06-1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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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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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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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비석 안동 3·1운동 기념비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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