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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32
성명
한자 金在華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3. 18. 경남 진주군 진주읍 장날의 만세 시위(萬歲示威)계획(計劃)하고 시민(市民) 학생(學生)들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행진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1919. 6. 17.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을 받고 복역(服役) (中) 옥중 순국(獄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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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진주(晋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의 진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강우(李康雨)·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박용근(朴龍根)·강상호(姜相鎬)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하여 비밀리에 배부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일본군경은 삼엄한 경계를 하며 각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고 타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어 강제 귀향시키는 한편,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조직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광림학교(光林學校)의 악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졸업한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김영조(金永祚)·이영규(李永圭) 등에게 시위행진 때의 주악을 부탁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이영규가 비봉산(飛鳳山)에 올라가 불어대는 나팔소리를 신호로 3개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시위대열은 악대를 선두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사태의 절박함을 느낀 일제는 헌병과 경찰력만으로는 이를 저지할 수 없게되자 소방대까지 출동시켜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곤봉으로 시위군중을 난타하였다.

오후 4시경, 이같은 일제의 폭력저지도 물리치고 경상도청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3만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일제는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3백여명의 체포되었는데, 결국 그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7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병으로 형집행정지되어 1920년 3월 29일 출감하였으나 1920년 4월 15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6. 17 대구복심법원)
  • 명적표(1920. 4. 15 순국)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89·290·29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재화 - 경상남도 진주(晋州) 진주군 진주면 만세운동
본문
1892년 7월 7일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집현면(集賢面) 하촌리(下村里)(현 진주시 하촌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1919년 3월 초 심두섭(沈斗燮)·조웅래·박대업 등과 서울에서 고종 장례식에 참석한 다음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갖고 돌아왔다. 귀향 즉시 집현면 하촌리 자신의 집에서 이강우(李康雨)·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정용길(鄭鎔吉)·박용근(朴龍根)·정준교(鄭準敎)·심두섭·조웅래·박대업 등과 진주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수정하여 배포 준비를 마쳤다.1919년 3월 10일경 주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을 제작해 비밀리에 배부하여 주민을 규합하자, 이를 눈치챈 일제 군경의 감시가 심해졌다.거사일을 3월 18일 진주면 장날로 정하고 강달영 ·박진환 등과 함께 진주지역 각 사회 단체에 연락하는 일을 맡았다. 김영조(金永祖)는 기독교회측과 교섭키로 하고,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김영조·이영규(李永奎) 등은 시위행진 시 주악을 맡기로 하였다.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 옛 대사지(大寺池) 매립지에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선언서와 교유문을 살포하였다. 시위대는 큰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악대를 선두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시위 군중이 애국가를 제창하면서 행진하자, 일제 헌병과 경찰, 그리고 소방대까지 출동하여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시위 군중을 진압하였다. 오후 4시, 경남도청에 이르렀을 때 시위군중이 3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저녁 무렵부터 일제 헌병과 경찰은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을 체포하였다.다음날인 3월 19일 오전 11시 읍내에서 악대를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고, 일제 헌병의 총검에 부상자가 늘어갔다. 진주면의 만세시위는 3월 21일까지 진행되었다.이후 시위를 주도하였다고 하여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형집행이 정지되어 1920년 3월 29일 풀려났으나, 1920년 4월 15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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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3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6-17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9-0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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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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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비석 3·1독립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진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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