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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30
성명
한자 金在桂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3. 15 전남 장흥군 천도교(天道敎) 교구장(敎區長)으로 군내(郡內) 천도교도(天道敎徒)에게 49일 기도(祈禱)를 하게 하여 독립운동 자금(獨立運動資金) 500(圓)갹출(醵出)하고 서울천도교중앙총부(天道敎中央總部)납입(納入)하는 한편 서울에서 전달(傳達)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장흥군(長興郡)강진군(康津郡)배부(配付)하고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주도(主導)하였으며 1933. 9월 이래(月以來) 멸왜기도문(滅倭祈禱文)작성(作成)하여 매일(每日) 읽게 하다가 1937. 7. 7. 중일전쟁(中日戰爭)발발(勃發)하자 절호(絶好)독립기회(獨立機會)가 왔음을 확신(確信)하고 전국적(全國的)으로 일국(日國)멸망(滅亡)기원(祈願)하는 기도(祈禱)실시(實施)케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일경(日警)잔악(殘惡)고문(拷問)으로 사망(死亡)(옥중사 간주(獄中死看做))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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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라남도 장흥(長興)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천도교(天道敎)의 장흥 교구장(敎區長)으로 있으면서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지시에 따라 서울로 독립운동성금 5백원을 가져가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인접 교구에 보내었으며, 면 별로 만세시위운동을 조직화하여 3월 15일 장흥군의 독립만세운동을 총지휘하였다.

3·1운동 후에는 천도교 중앙총본부의 금융관장(金融觀長)이 되었으며, 1936년에는 대도주(大道主) 박인호(朴寅浩)가 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地日紀念日 ; 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의 승통기념일)을 계기로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뜻에 따라 교인들로 하여금 아침저녁 식고(食告)할 때마다 일본의 멸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를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다른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 교도로 하여금 안심가(安心歌)의 한 구절인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一夜間)에 소멸하고 전지무궁(傳之無窮)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汗)의 원수 갚아보세」를 암송하며 「멸왜기도(滅倭祈禱)」를 드릴 것을 지시하여 이를 실시하였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이 국권회복의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보고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멸왜기도」를 실시하다가, 1938년 2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중일전쟁 수행상 사건을 확대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70일만에 그를 기소유예로 석방했으나,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석방되자 얼마 후에 바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60·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73·61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06·707·708면
  • 매일신보(1938. 5. 1)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재계 호 : 성암(聲庵) 전라남도 장흥(長興) 3.1운동, 멸왜기도사건(무인독립운동)
본문
1888년 4월 25일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대덕면(大德面) 신상리(新上里, 현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에서 동학교도인 김규현(金奎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성암(聲庵)이다. 어려서 한문을 익힌 뒤 15세에 천도교에 입문하였다. 17세 때 손병희(孫秉熙)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던 중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1906년 강봉수(姜琫秀)·윤세현(尹世顯) 등과 함께 장흥에 천도교당(天道敎堂)을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금하여 교당을 개설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때 여비로 조달하였다. 이후 천도교 장흥교구(長興敎區)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고,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장흥군 교구장(敎區長)으로 있었다.1919년 3월 6일 교구장으로서 장흥군 내 천도교도에게 49일 기도를 하게 하여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모금하였다.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이를 서울의 천도교중앙총부(天道敎中央總部)로 보냈다 아울러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장흥군을 비롯해 인접한 강진군(康津郡) 교구의 송화전(宋化田) 등에게 배부하였다. 곧바로 장흥교구 직원 김재반(金在班)·황생주(黃生周)·황업주(黃業周) 등과 함께 장흥의 3월 15일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각 면(面) 별로 연락 준비의 책임도 결정하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추가로 등사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1919년 3월 15일 장날 오후에 읍내 장터에서 김재반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의 신호를 알리고, 수백 명 군중의 만세시위운동을 진두에서 지휘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3월 16일 일제 경찰에 20여 명의 천도교인과 함께 붙잡혀,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이후 이른바 ‘천도교 구파(舊派)’에 속하여 선교와 사회운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대에 천도교중앙종리원(天道敎中央宗理院) 종리사(宗理師), 1928년부터 천도교중앙종리원 경리과 대표위원, 1931년 천도교중앙종리원 감사관정(監査觀正), 1932년부터 천도교중앙총본부 금융관장(金融觀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 사이 1925년 8월 이래 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천도교통일기성회(天道敎統一期成會)를 발기하고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31년 10월 천도교 구파와 신파의 합동이 제창되었을 때 오상준(吳尙俊)·이종린과 함께 구파의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입도조문(入道條文), 제도 문제, 법회(法會) 용어의 개정, 고문실(顧問室) 신설 등을 약정하고, 같은 해 12월 23일 합동총회를 열어 정식으로 합동을 선언하였다. 이날 집행부 선임을 위한 전형위원, 교회 집행기관으로 검사(檢査) 업무를 주관하는 감찰원정(監察元正)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1933년 9월 최준모(崔俊模)·한순회(韓順會) 등과 함께 천도교에 의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멸왜기도문(滅倭祈禱文)」을 작성하여 전국의 천도교도들을 대상으로 읽게 함으로써 항일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내용은 「안심가(安心歌)」의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써,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으로부터 조화를 받아 하룻밤 사이에 소멸시키고, 그 사적(史蹟)을 후세로 무궁하게 전할 것을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이(汗夷)의 원수 갚아보세”라는 것이다. 1936년 2월 황해도 각 군의 천도교회를 중심으로 부인강좌(婦人講座)를 개최하고 강사로 활동하는 등 천도교 간부로서 다수의 강연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아울러 1920~30년대에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에 다수의 글을 남겼다.1936년부터는 대도주(大道主) 박인호(朴寅浩)가 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地日紀念日)(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의 승통기념일)을 계기로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뜻에 따라 교인들로 하여금 아침저녁 식고(食告)할 때마다 일본의 멸망을 기원하는 특별 기도를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림에 따라, 다른 중앙 간부들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전국 교도들을 대상으로 위의 기도문 내용을 암송하며 ‘멸왜기도’를 드릴 것을 지시하였다.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고, 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같은 해 12월 20일 최준모, 한순회 등과 특별기도 문제를 협의하여, 종전대로 하면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을 것이므로 표면적으로 “동양 평화의 기초가 하루바삐 확립되기를 기원한다”는 문구를 부가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교도들에게는 이는 관헌을 기만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지도하였다. 이들은 전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멸왜기도’를 실시하고 「안심가」를 부르게 하였다.이와 같은 활동이 1938년 2월 17일 황해도 신천경찰서에 발각되면서 전국적으로 천도교 교역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사변하의 지하활동」, 「극비의 불온계획」, 「조선독립을 몽상」, 「천도교의 대 음모」, 「특별희사금도 모집」, 「불온문 특별기도문 일반신도에게 배부」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천도교계의 이 같은 활동은 당시 ‘멸왜기도사건’, ‘무인(戊寅)멸왜기도운동’ 등으로 불렸으며, 오늘날 ‘무인독립운동’으로 일컬어진다.1938년 3월 4일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으며, 주도자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30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황해도경찰부에서 해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국(送局)되었다. 일제 당국은 전시하에서 사건이 확대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같은 해 5월 11일 밤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 하지만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40년 6월 27일 서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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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전라남도 장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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