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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690
성명
한자 金文鎬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광복군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37년 중국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중국으로 망명한 이래 중국군에 입대하여 제3전구(戰區) 영파 방수사령부(寧波防守司令部) 정치부(政治部)에 복무하면서 대일 선전 공작(對日宣傳工作)적정 수집(敵情蒐集) 등 공작을 담당하는 한편 일군(日軍)에게 반전 사상(反戰思想)을 방송하는 등 활동하다가 1940.9.17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성립되자 징모처(徵募處) 제3분처(分處) 주임(主任)이 되어 일국(日國) 만주(滿洲) 화북(華北) 상해(上海) 남경(南京) 등지의 연락망을 구축하기 위하여 중국(中國) 강서성(江西省) 상요(上饒)에 파견되어 1945.8.15 광복(光復)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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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황해도 해주(海州) 사람이다. 그는 해주 보통학교 및 동 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1933년 4월 조도전 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1937년 3월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독일 기선을 타고 일본 장기(長崎)를 탈출하여 절강성 영파(浙江省 寧波)로 망명하였다. 1937년 8월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영파 방수사령부(防守司令部) 정치부에 특채되어 1939년 12월 소교(少校)로 진급하고 3전구 방송국에서 반전방송을 하였으며 일본군 포로 심문과 일본 문서 및 서적 등에서 적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중앙군관학교 제3분교에서 특수교육을 받았다.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함에 중경에 복귀하였다. 다음 해 3월 1일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광복군 제3징모처(第三徵募處) 임명식이 거행되어 그는 주임위원 겸 선전 조장에 임명되어 강서성 상요(江西省 上饒) 방면에 파견되었으며, 제3지대 편성을 위한 준비활동을 하였다. 그는 대원들과 함께 염전사상고취 전단, 일본군 귀순통행증 등을 화물차에 싣고 야전 방송기재를 휴대하고 금화지구로 출동하여 선전물을 살포하고 일선방송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선전물을 미군 비행대에 공급하여 적군 점령지역에 공중 살포하게도 하였다. 그리고 각종 선전물을 갖고 절강성 천태현(天台縣)으로 나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제1유격 정진군종대(挺進軍縱隊) 사령부와 합작하여 일선공작을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제1지대로 편입되는 등 광복군의 조직을 개편함에 따라 징모제3분처는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로 편성되었다. 당초 1개 지대의 편성을 목표로 하였던 징모제3분처를 한지대의 1개분대로 하고 분처 주임인 그를 분대장으로 개편한 것이다. 그러나 실지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제2지대 본부가 있던 섬서성 서안과 제3분처의 소재지인 남평과는 수천 리의 원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통신연락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주임위원인 그를 중심으로 한 간부회의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운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전선과 후방에서 중국 유격대와 합동 공작으로 정보·선전공작을 전개하며 포로심문을 통하여 적의 일선 및 후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작에 활용하였다. 1944년부터 그의 분대는 건양(建陽)에 근거지를 두고 항일선전 및 초모공작과 한미(韓美) 합작의 작전을 지원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7 373 379면
  •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222 223 224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자료 1권 475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624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77·781·82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11 233 234 236 237 238 439 440 44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38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74 85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235·237·264·267·83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문호 - 황해도 해주(海州) -
본문
1911년 1월 5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백림(栢林)에서 출생하였다. 해주보통학교와 해주동중학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37년 중국에 가서 각지를 유랑하다가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에서 중국군에 체포되어 심문받던 중, 중국인 와세다대학 동창생을 만나 1940년 6월부터 중국 제3전구 사령부에서 정치부 설계위원으로 복무하였다. 포로 심문과 선전공작에 참여하다가,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찾아갔다. 1941년 3월 1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 거행된 광복군 징모(徵募) 제3분처 성립식에서 주임 겸 선전조장에 임명되어, 한도명(韓道明, 훈련조장)·이지일(李志一, 정보조장)·신정숙(申貞淑, 회계조장)·강치명(姜治明)과 함께 중국군 제3전구의 중심지인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에 파견되었다. 광복군 병력 모집과 선전공작 임무를 맡아 6개월간 징모 활동을 벌여 23명을 모집하였다. 『유주일보(柳州日報)』 1941년 4월 17일자에 실린 한진원(韓鎭源)의 「조선인의 입장에서 본 삼민주의」에 의하면, “한국인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한국광복군 동남지대의 징모 업무 담당하고 있었다”라고 한다. 1942년 10월 1일 징모 3분처가 제2지대 3구대 3분대로 개편되면서 분대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1월 24일 이소민(李蘇民) 구대와 더불어 3분대가 제3전구(장관 구주통[顧祝同])에서 활동하였다. 중국 측 자료에 “김문호와 상급자인 제1지대 제2구대장 이소민은 계통이 달라 평소 의견 충돌이 빈번하다. 김문호는 공산당 계열로 분류되는 이소민과 서로 한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어, 이 지역 한국광복군의 내홍이 심각하다”라고 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에 합류한 조선의용대와 갈등을 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945년 3월 31일 시점에서 이끌던 3분대가 젠양(建陽)에서 활동하였음이 확인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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