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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광봉동(光峰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내찬(金乃贊)이 있다. 1920년 당시 34세로 8월에 보합단에 입단하여,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는 소모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보합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법에 호응하여 1920년 3월경 평북 의주 출신인 김동식(金東植)이 주도하여 이 지역의 한문서당 훈장 김시황(金時璜)과 함께 일대의 청년을 모아 결성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1920년 5월 9일에는 철산군 여한면사무소에서 등사기를 강탈하고, ‘적(敵)의 관리가 된’ 철산군 서림면 양책주재소 순사 송용범(宋龍範)을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6월 초 의주군 고관면 동암산으로 본부를 옮기고 이곳에서 경고문, 군자금영수증, 의용대 입대증, 임원 임명사령용지, 단칙 등을 인쇄를 하여 구비하였다. 그리고 김동식을 총무로 하고, 재무부, 소모부, 교통부, 조사부를 두어 체계적인 조직체를 갖추었다. 곧 김시황의 친족인 김내홍과 김내범 형제, 김승옥이 먼저 입단했으며, 이들에 이어서 1920년 8월 입단하였다. 같은 마을에 살던 지인인 김흥도, 심창숙, 그리고 같은 서림면 거주자 김병규, 조창화, 심창업 등이 잇달아 가세하였다.
보합단은 2~3명을 1조로 하여 무기를 휴대하고 철산·의주·용천·선천 등지의 집들을 방문하여 1921년 1월 현재 독립운동 자금 6,750여만 원을 모았다. 이 중 일부를 중국 안둥현(安東縣) 의성여관 김영율(金永律)을 통해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한편, 중국에서 직접 총기를 구입하고 폭탄도 제조하였다. 또한 군자금 제공을 거절하는 자, 관헌에게 밀고하는 자, 한국인 형사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자를 처단하는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박여준(朴汝俊)·정봉순(鄭鳳淳)·한화현(韓和見) 등 6명과 함께 철산군 내에서 김요옥·정하응 등 부호를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1920년 9월 29일 김시황 단장 외에 동지 심창숙, 한영구 등 10여 명과 함께 비현면(枇峴面) 정산동(亭山洞)의 전 순사인 문치무(文致武)의 집에 가서 독립운동자금 2만 원을 요구하였다. 요구가 거절되자 김시황 단장이 민족 배신과 친일행위죄를 물어 사형 집행을 명령했고, 이 지시를 따라 다른 동지들과 함께 문치무를 처단하고 그의 첩과 장남에게 중상을 입혔다. 9월 30일 일행 22명이 또한 철산군 참면(站面) 도참사 오기원(吳基源)과 의주군 월화면 면장으로부터 엽총을 징발하였다. 1920년 10월 2일 철산경찰서 수사대가 내산동 본부를 습격하여 재무원 한우종(韓禹種)·이동원(李東元)·김응초(金應焦)가 사살되고 단장 김시황은 부상을 입고 중국 콴뎬현(寬甸縣)으로 피신하였다. 습격을 피해 도주했으나 1921년 2월 말경 자택에서 신의주경찰서 수사대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6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폭발물 취체 벌칙 위반, 강도 살인 방화죄로 사형 판결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21년 9월 2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21년 11월 1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22년 2월 2일 오후 1시 김형석·심창숙·김흥도와 함께 평양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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