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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7654
성명
한자 姜錫奉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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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7. 3월 평남(平南) 평양(平壤)에서 국권(國權) 회복(恢復)목적(目的)으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가입(加入)하여 전라도구역장(全羅道區域長)이 되어 회원모집(會員募集)국민보(國民報) 등을 배부(配付)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고 1919. 4. 8 목포부내(木捕府內)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참여(參與)하여 궐석재판(闕席裁判)으로 징역 2년을 받았으나 1923년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의 실형(實刑)을 받아 복역(服役)하였으며 1927. 8월에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중앙집행요원(中央執行要員)으로 선출(選出)되어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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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전남 목포(木浦) 사람이다.

1900년 부친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였다가 귀국하여, 하와이 국민회(國民會)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新韓國報)〉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장일환(張日煥)·서광선(徐光鮮)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던 중 1918년 2월 평양경찰서에 붙잡혀 3월 16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독립에의 열망은 조금도 식지않아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에서 동지 서상봉(徐相鳳)·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박복영(朴福永)·양병진(楊炳震) 등 기독교 중심의 시위계획을 세웠다.

1919년 4월 8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청년 학생과 기독교인들이 선언서·경고문·태극기등을 제작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경의 무자비한 무력 탄압으로 남교동(南橋洞) 시장 일대를 피로 물들였으며, 주동 인사들을 속속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일단 피신하여 붙잡히지는 않았으나 궐석판결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수년간 피신하던 그는 1923년 1월 대구(大邱)에서 마침내 일경에게 붙잡혀,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및 협박죄 등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27년 그는 다시 청년단체인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7년 8월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현대사자료(강덕상 저) 25권 35∼37면
  • 조선사비판(북한연구소) 143·144·14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5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56·61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87면
  • 동아일보(1923. 1. 29, 1927. 8. 14)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석봉 - 전라남도 목포(木浦) 105인사건, 조선국민회사건, 목포 3.1운동
본문
1890년 9월 23일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 수정동(水晶洞)에서 아버지 강영숙(姜永淑)과 어머니 이문순(李文順)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본적지는 전남 목포 죽동(竹洞)이다. 어려서 부친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 카우아이섬(加哇伊, 加哇島, Kauai) 할리하카(Halihaka, 일명 하리학가)에서 살았다. 1900년에 이주하였다고 알려졌지만 1903년 하와이 이민이 개시된 후 이주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1909년 2월 1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성립하자 지방총회 산하 할리하카지방회에 가입하였으며, 2월 12일 할리하카지방회의 사찰로 선임되어 회장 박수선, 부회장 최정섭 등 간부진을 보좌하였다. 같은 해 6월 12일 간부진이 개선될 때 서기로 피선되어 회장 김요한, 부회장 정운경, 총무 김백수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 무렵 국권침탈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던 호항(湖港, 호놀룰루) 공동회(共同會)에 50전을 기부하였다. 1909년 7월에는 카우와이섬 마카웰리(Makaweli)에 있는 융희학교(隆熙學校)를 유지하기 위한 연보금으로 50전을 헌납하였다. 1909년 하반기에 하와이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후 본적지에 거주하면서 물산 중개업(객주업)에 종사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가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 등의 105인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에 연루되었다. 1915년경부터 장일환(張日煥)·서광조(徐光朝)·백세빈(白世彬)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조직 준비에 착수하였다. 장일환과 백세빈은 중국 화폐를 위조하여 자금을 확보한 후 간도에 토지를 구입하여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자고 주장하였지만 그런 방식은 발각될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그 계획을 중지시켰다. 이후 동지를 규합하는 데 힘쓴 결과 배민수(裵敏洙)·김형직(金亨稷) 등을 획득하였다. 한편으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발행하는 『국민보』를 비밀리에 국내로 들여와 배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7년 3월 23일 평양에서 정식 출범한 비밀결사 조선국민회에서 전라도 구역장(區域長)을 맡았다. 재미(在美) 국민회 및 기타 재외동포와 연락을 도모할 것, 중국 간도 방면에 회의 세력을 부식(扶植)할 것, 유지비로서 매월 20전씩 회비를 징수할 것,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에 구역장을 두고 회원 모집에 힘쓸 것, 내외의 연락기관으로 중국 안둥현(安東縣, 현 丹東)에 백세빈을 배치하고 베이징(北京)에 통신원 1명을 둘 것 등 조선국민회의 실행 세칙 아래 전남북 지역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국민보』를 배포하는 등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조옥초(趙玉肖) 등 전남 보성군 벌교면 무만리(武萬里) 출신 청년들이 회원 혹은 준비회원으로 가담한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조선국민회 회원 중에는 평양 숭실중학교 및 숭실대학교 학생과 졸업생, 기독교계 인사가 많았다. 일부 회원은 중국 무관학교 입학을 계획하거나 군자금 수합과 무기 구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국민회 조직 사실이 폭로되어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었는데 1918년 4월 9일 장일환이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할 정도로 혹독하게 취조당하였다. 1918년 2월 9일 검사국에 송치된 후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평앙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18년 11월 11일 출옥하여 목포로 돌아왔다. 귀향한 지 수개월 만에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이에 조선국민회 활동을 함께했던 서광조의 부친이자 기독교 장로인 서상봉(徐相鳳, 徐岐見), 장로 곽우영(郭宇盈, 郭宇英), 집사 서화일(徐化壹, 徐化一), 박복영(朴福永), 배치문(裵致文),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학생 남궁혁(南宮爀), 서울 휘문의숙 학생 김영주(金榮周), 청년 미곡상 박상렬(朴相烈), 서울 유학생 오도근(吳道根) 등 목포 양동교회 신자 및 청년 학생들과 연계하여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군중 동원과 태극기 등을 준비하였다. 1919년 4월 7일 밤부터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경고문(警告文), 조선독립신문 등을 배포한 후 다음 날인 4월 8일 기독교청년회원, 목포공립상업학교·영흥학교·정명여학교·목포보통학교 학생과 시민들을 규합하여 남교동(南橋洞), 죽동 일대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음날에도 시내 이곳저곳에서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주동자와 참여자들이 속속 검거되는 가운데 피신에 성공하였지만 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2년, 벌금 80원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제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수년간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경북 대구 명치정에 은신 중 1923년 1월 24일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은 후 목포로 압송되었다. 1923년 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협박죄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서 옥살이 한 후 1924년 2월 3일 출옥하였다. 1924년 9월 22일 목포무산청년회(木浦無産靑年會) 임시총회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어 회의를 진행하였다. 이날 배치문 외 6인과 함께 보천교(普天敎) 성토 안을 제출하여 가결하였다. 1924년 9월 30일에는 목포무산청년회에서 개최한 보천교 성토 연설회의 연사로 출연하여 「보천교와 민중의 해독」이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이후 생업인 곡물 중개업에 종사하면서 상인 단체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1년 11월 5일 곡물을 취급하는 중개업자(問屋)들의 단체인 목포물산수탁조합(木浦物産受托組合)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35년 7월에는 목포문옥조합(木浦問屋組合) 간부로서 화물 집산지인 부두의 곡물 거래 현장에서 두량(斗量) 사용을 권장하고 간상배(奸商輩)를 취체하는 매매 감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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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독립운동 탑 전라남도 목포시
2 비석 독립 기념비 전라남도 목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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