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부산에서 1919년 3월 3일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고, 3월 11일 오후 9시 좌천동에서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학생과 교사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2일 동래군 동래면에서 기독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동래시장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구포면에서는 3월 29일 구포시장(龜浦市場)에서 농민·상인·노동자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면 면서기 임봉래(林鳳來)를 찾아가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달했다. 이어 하순경 양봉근은 임봉래 집에서 임봉래·윤경(尹涇)·유기호(柳基護)를 만나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권유하고 상경했다.
이들 3명은 우선 허정(許楨)·김옥겸(金玉兼)·김윤길(金潤吉)·김용이(金用伊)·최종호(催宗鎬) 등의 합류를 이끌어냈다. 이들은 구포리 박영초(朴永初)와 이수련(李守連) 집에 모여 만세운동을 협의해 3월 29일 구포 장날에 실행하기로 결의했다. 3월 27일 밤부터 박영초 집에서 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만들고 3월 28일 밤에는 공목으로 태극기 1기(旗)와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깃발을 제작했다.
3월 29일 정오경 구포 장터에 장꾼들 사이에 있던 허정은 김옥경, 박영초 등 30여 명 청년들과 함께 깃발을 꺼내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오후 3시경 허정은 임봉래·윤정은(尹正殷) 등과 함께 시위에 따른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소리쳤다. 진유관(陳有寬)·김용이(金用伊)·윤대근(尹大根) 등이 협력하여 늘어난 2,000여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독립운동 참여로 허정 등 37명은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부터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예심종결결정서(豫審終結決定書)(부산지방법원:1919. 7. 16)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3. 31, 4. 2, 8. 9)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7)(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31보, 1919. 3. 30)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1)(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관한 건, 1919. 10. 2)
- 대정(大正)8년 소요사건(騷擾事件)에 관(關)한 도장관보고철(道長官報告綴) 7책(冊)의 내(內)(2)(경상남도장관, 전보, 19199. 3. 30)
- 3.1운동실록(이용락, 1969) 612~614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3권 191~1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