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30년에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31년에 돌아왔다. 제주도(濟州島) 한림면(翰林面)에서 고갑선(高甲善) 등과 함께 사회주의자 이익우(李益雨)의 지도를 받았다. 같은 해 말경 이들과 함께 한림독서회(翰林讀書會)를 조직했다.
1932년 5월경 김경봉(金京奉) 등과 회합하여 한림리(翰林里)에 사회운동의 지도기관을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전체 책임과 타 지방과의 연락은 김경봉이 맡았으며, 나머지는 각자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해 동지를 규합하기로 했다. 6월 하순경 운동자연구회(運動者硏究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청년부(靑年部)를 맡았다. 운동방법은 ‘가두를 배회하지 말 것, 주의적 교양에 노력할 것, 합법단체에 들어가 농민대중을 의식화할 것, 독서회를 조직하여 동지 획득에 노력할 것’ 등이었다.
1932년 10월 중순경 김경봉 등과 회합했다.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 결성의 준비로 제주의 각 리(里)에 반(班)을, 각 면(面)에 지부(支部)를 설치하고, 외곽단체로 각 리에서 농민위원회(農民委員會)를 조직해 각각의 반(班)을 두어 지도하기로 했다. 그 준비로서 새로 ‘운동자연구회’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위의 운동자연구회와 마찬가지로 책임부서와 담당을 정했다. 같은 해 말경 한림면의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에 가입하고, 그 총무를 설득하여 함께 구우면장(舊右面長)이 주창한 ‘도로 확장수리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1월 28일 부병훈(夫秉勳)·김경봉 등이 설립한 ‘제주도 적색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에 참여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6월 중순경 김경봉·장창구(張昌求) 등과 회합하여, ‘성질이 온순한 자, 음주하지 않는 자, 비밀을 엄수하는 자’를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는 등 운동방침을 협의했다. 1934년 2월 민풍진흥회를 통해 ‘도로수선 무상부역 반대, 면 당국이 지정한 공동목야 설치 반대, 한림 축항공사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7월 구우면 명월리(明月里) 수박밭에서 김경봉 등과 함께 한림리 적색노동조합 및 농민조합 결성을 위한 준비로 ‘노농연구회(勞農硏究會)’라는 결사를 조직하고, 농민부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농민부는 주로 농민청년을 규합하여 독서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전위부대로 양성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34년 10월경 제주경찰서(濟州警察署)에 체포되었다. 12월 28일에 동지 60여 명과 함께 목포검사분국으로 송치되었다. 여섯 차례의 공판 끝에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광주지방법원:1937. 4. 12)
- 제주항일독립운동사(제주도지편찬위원회, 1996) 713~7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