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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38
성명
한자 呂運亨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2008 / 2005 훈격 대한민국장 / 대통령장

관련정보


2021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장 공적>
해방이후에도 대한민국 건국 및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공적으로 2008. 2. 2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 하였음.(행안부 추천)

<대통령장 공적>
1918년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당수(黨首)로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는 한편, 국내에 김철(金徹), 선우혁(鮮宇爀) 등을 파견, 3·1운동을 촉발시키고 1919년 4월 상해임정 수립 과정에서 독립운동 정당(獨立運動政黨) 결성을 주장했으나, 임정 수립 후 외무부 차장,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 임정(臨政)이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데 기여했으며, 민단(民團) 단장으로 상해거주 교포들의 권익향상에 노력하였고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 교포자제의 교육에 힘쓰고 1919년 11월 동경(東京)을 방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을 역설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1921년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에 참여, 한·중 양민족의 공동 투쟁과 이해증진을 모색하였으며,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 일원으로 참석, 조선독립을 역설하였고, 독립을 실현할 목적으로 김구(金九) 등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임정의 수호를 위해 개조론(改造論)을 개진하였으며,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孫基禎)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본인은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신문은 폐간되었고 1940∼1942 5차례 동경(東京) 방문을 통해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建國同盟)을 조직, 조국광복을 준비하는 등 28년에 걸친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2차례에 걸쳐 징역 3년과 징역 1년에 집행유예(執行猶豫) 3년을 받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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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어려서부터 신학문을 익혀 배재학당(培材學堂)·흥화학교(興化學校)·우무학교(郵務學校) 등에서 수학했으며, 1908년 부친 탈상 이후 집안의 노비들을 과감히 해방시키는 등 봉건 유습의 타파에 앞장섰다.

그리고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10년에는 강릉의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민족교육에 매진하기도 했다.

1911년 기독교 목회자가 되기 위해 평양의 장로교연합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국 여행 중 생각을 바꿔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이 무렵 그는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기도 했다.

1917년부터 상해로 무대를 옮겨 민족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갔다. 1918년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우리들 소식』을 발행하였다. 이 무렵 그는 구미에 유학하려는 70여 명의 한국 학생들에게 유학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1918년 8월 터키청년당을 모방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약했다. 마침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그는 텐진[天津]에 있던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을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파견했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계획 추진했으니, 그것이 3·1운동의 태동이었다. 그는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에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촉발케 했으며, 국내에 김철(金徹)·선우혁(鮮于爀) 등을 파견하여 국내 인사들과 접촉하게 하고, 자신은 간도·시베리아 방면으로 가서 만세운동의 분위기를 진작시켜 나갔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3·1운동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다. 여운형은 만주와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중앙 기관을 상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때 이동녕(李東寧)·조완구(趙琬九)·조성환(曺成煥) 등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 무렵 여운형은 독립운동의 통일적 조직형태를 강조했지만, 임시정부와 같은 거대의 조직형태보다는 당(黨)에 의한 결합을 주장했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에는 적국의 심장부인 일본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상하이[上海]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한인 교민사업에도 관여했으며, 인성학교(仁成學校) 설립과 동교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1920년 여름 국제공산당 위원 보이친스키가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상하이에서 한인독립운동자 중 유력자회의를 개최하고자 할 때, 여운형은 김만겸을 통해 보이친스키와 회견을 가졌고, 이어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때 고려공산당 입당은 ''독립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한''때문이었다.

그런데 1921년 김립(金立)의 노농정부 자금횡령사건으로 그는 이동휘(李東輝)와 결별하고, 김만겸(金萬謙)이 주도한 이르쿠츠크파와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참가했다.

1921년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에 참가하여 한·중 양민족의 공동 투쟁과 이해증진을 모색하였다. 한·중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조했던 그는 국제정세의 흐름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나아갈 방향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다.

상해로 돌아와서는 1922년 10월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 아래 백범(白凡) 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도 준비해 갔다. 동회는 ''10년 동안 1만명의 노병 양성과 백만원 이상의 전비 확보''를 목표로 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그러는 가운데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의 재편 문제가 크게 부상하자,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그는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였다. 그가 사회·정치사상을 초월한 독립운동계의 조직 통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된 것은 1922년 1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면서였다. 독립운동전선의 단결과 재정비를 목적한 국민대표회의는 코민테른의 동방정책과 중국의 국민혁명(國民革命)이라는 국제적 조건과 우리의 독립운동전선이 조응하며 일구어낸 성과물이었다. 이때 개조파에 섰던 그는 당초 기대와 달리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이후 중국의 국공합작(國共合作)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그는 중국 공산당원 구추백(瞿秋白)과 손문(孫文), 그리고 요페·카라한·보로딘 등 소련 고문단 등의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중국 국공합작 성립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역할과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무렵 그의 중국혁명론은 ''국민당(國民黨)과 군벌 풍옥상(馮玉祥)의 협상, 국민당의 중국공산당 지원과 상호 연대, 소련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등의 구도로 설정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곧 국공합작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당시 중·소 인사들에 의해 크게 환영받았고, 이로써 그는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과 소련 사이에서 연락 책무의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한국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즉 그는 중국혁명의 완성을 한국 민족혁명의 전제로 보았고, 또한 중국의 혁명론과 같은 방식에서 민족혁명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925년 1월 중·소협정이 체결될 무렵, 그는 중국인 공산주의자 왕걸(王杰) 등과 함께 상해에서 중국의 국공합작과 한국독립운동의 연대, 한국 사회주의운동세력의 통합, 약소민족의 운동세력과 국제적 연대 등을 골자로 하는 협약을 맺으며 한·중연대를 통한 민족운동을 구상해 갔다. 그는 국내 사회주의자들과도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5년 12월에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면서 김찬(金燦)·김단야(金丹冶) 등이 상해로 망명해 오자, 이들과 함께 1926년 1월에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를 조직하였다. 이 무렵 그는 광둥[廣東]과 상해를 왕래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26년 1월 광둥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중국혁명에 대한 국민당의 사명''이라는 제하의 축사에서 중국의 국민혁명이 약소민족의 해방과 직결된다는 연설을 행한 바 있었다. 또한 그는 황포군관학교 교관 손두환의 주선으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독립운동의 자금지원 및 한인 청년들의 황포군관학교 입교문제 등을 교섭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는 동년 2월에 임시의정원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상해파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1926년 2월에는 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무산운동과 민족운동과의 연합''을 표방하면서 사회주의운동을 진작시켜 나갔다. 또한 광둥에서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를 결합한 비밀결사 공청사(共靑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동년 5월 상하이[上海]에서 안공근(安恭根)·조상섭(趙尙燮)·최창식(崔昌植)·이유필(李裕弼)·오영선(吳永善) 등과 한국독립운동촉진회를 결성한데 이어 6월에는 다시 광둥[廣東]을 찾아 조선공산당 광동지부 설치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융희황제가 승하하자, 이를 만세운동의 절호의 기회로 삼아 임시상해부가 6·10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해 갈 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만세운동때 사용하기 위한 격문을 최창식(崔昌植)이 경영하는 삼일인쇄소에서 인쇄하게끔 알선하는 한편 6·10만세운동에 때맞추어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가 국내 의거를 추진하는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상하이를 주무대로 활발한 항일투쟁을 벌이던 중,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이로 인해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1940~1942년 에 여러차례 도쿄[東京]을 방문한 바 있는 그는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建國同盟)을 조직하여 조국광복을 준비해 갔다. 두 차례에 걸쳐 일경에 검거되어, 징역 3년과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30. 4. 26)
  • 思想彙報(조선총독부 고등법원검사국, 1943), 4호 182~186면
  • 思想彙報續刊(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1943년) 182~186면
  • 東亞日報(1932. 7. 28, 1926. 2. 20)
  • 朝鮮日報(1923. 6. 7, 1929. 7. 14․18~20․26․28․30․31, 8. 2․5․7․8․11․17, 9. 16, 1930. 3. 5․8․10~13․25, 4. 10․27, 5. 3․4, 6. 10)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8권 40, 56, 258면
  • 한국민족운동사료(中國篇)(국회도서관)17, 19, 20, 24, 25, 33, 40, 54, 63, 151, 218, 273, 305, 414, 446면
  • 도산안창호전집 제4권 日記(1920년 7월 7일자)
  • 騎驪隨筆(宋相燾, 1955) 235, 244, 245, 246, 355, 358면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6) 제2권 161, 163, 461, 419, 440, 465, 471, 512, 516, 547면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6) 제1권 分冊 262면
  • 몽양 여운형(여운홍, 廈閣, 1967) 95~104, 122~126, 256면
  • 宇垣一城日記(みちち書房, 1971) 제3권 1940년 3월 23일조
  • ‘呂運亨調書 2’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1)(고려대학교출판부), 307, 3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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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운형 자 : 호 : 몽양(夢陽) 초명 : 이명 : 여광(呂光) 경기 양평(楊平) -
본문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근군(楊根郡, 현재의 양평군) 양서면(楊西面) 신원리(新院里) 묘곡(妙谷)에서 아버지 여정현(呂鼎鉉)과 어머니 경주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충북 단양(丹陽)에서 잉태되었으나 출생은 묘곡이었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호는 몽양(夢陽)이다. 동생은 여운홍(呂運弘)이다. 집안은 대대로 소론파에 속하는 양반 가문이었다. 어머니가 태몽으로 태양을 안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호를 몽양(夢陽)으로 하였다. 1891년부터 1900년까지 향리에서 조부에게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9년 아버지의 명으로 용인군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1900년 서울로 올라와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고, 1901년에는 고종(高宗)의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이 세운 흥화학교(興化學校)로 전학하였다. 1903년 조부와 임신 중이던 처가 사망하였고, 같은 해 흥화학교를 중퇴한 후 통신원 부설 우무학당(郵務學堂)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 7촌 숙부 여병현(呂炳鉉)의 영향을 받았다. 여병현은 일본과 미국 유학생 출신이자 혁신유학과 양명학의 신봉자로 배재학당의 영어교사, 흥화학교의 교사였다. 배재학당에서 영어와 기독교, 근대적 학문을 접하였으며,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 토론회에서 토론과 웅변을 익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모친이 사망하자 우무학교를 중퇴하였다. 1905년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으며, 슬하에 8남매를 두었다.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르며 향리에서 농사를 짓고 사서삼경을 읽었다. 1907년 고향 양평에서 기독교 학교인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7년부터 기독교를 믿기 시작해, 1908년 장로교목사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한국명 곽안련, 郭安連)의 조사(助事)가 되어 1913년까지 일하였다. 1908년 계몽운동단체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듣고 감명받은 이래 독립운동가 ・ 웅변가의 길을 찾았다. 계몽운동의 본산인 승동학교(勝洞學校)에 출입하며, 계몽운동단체 기호학회(畿湖學會)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지회를 설립해 활동하며 금연과 국채보상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1908년 부친 탈상(脫喪) 후 신주(神主)단지를 묻고 노비문서를 불사르며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였다. 1910년 사촌동생 여운일(呂運一) 등과 함께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내려가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청년교육에 전념하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았다. 1911년 여름 일본 연호(年號) 사용 거부로 경찰의 퇴거명령을 받아 서울로 돌아왔다. 클라크 목사의 권유로 평양 장로교연합신학교에 입학해 1912부터 1913년까지 총 5년간의 과정 중 2년을 마쳤다. 1911년 ‘백만구령(百萬救靈)’운동 당시 열변으로 4천여 명을 기독교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1913년 클라크 목사를 수행하고 신흥무관학교와 서간도 각지를 방문하는 전도여행을 하였다. ‘105인 사건’과 중국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영향으로 중국 유학을 결정하였다. 언더우드(Horace Underwood, 원두우元杜尤) 선교사에게 중국대학 신학부 입학을 위한 추천장을 부탁하였는데, 언더우드는 여운형이 신학공부가 아니라 정치운동을 하러 간다고 파악하였다.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 영문과에 입학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1915년 1월 9일 중국 난징에 신학 연구를 하러 간다고 총독부 여권을 받은 기록이 있다. 동생 여운홍은 191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5년 5월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극동 올림픽대회를 참관하면서 신규식(申圭植), 조성환(曺成煥), 김규흥(金圭興) 등 중국동맹회와 관계있는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동제사(同濟社) ・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등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7년 봄 진링대학을 수료하고, 상하이로 건너왔다. 1917년 1월 상하이 한국인 기독교회의 전도인으로 선임되었으며, 영국인 선교사 에반스(Edward Evans)가 운영하는 이문사서관(伊文思書館)의 영문사무원으로 취직하였다. 그러나 곧 각 교회가 연합 출자한 상하이 협화서국(協和書局, Mission Book Company)으로 자리를 옮겨 위탁판매부 주임을 맡았다. 1917년 여름 귀국하여 부인과 장남 여봉구(呂鳳九), 이범석(李範錫)을 중국에 망명시켰다. 협화서국 운영을 맡고 있던 조지 피치(GeorgeF. Fitch)와 함께 1918년 말까지 약 70여 명에 달하는 한인 청년들의 구미(歐美) 유학과 도항을 알선하였다. 신규식 등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일정한 영향 속에 중국 ・ 일본에서 수학한 청년들과 함께 새로운 노선을 추구하였다. 1917년 『자림보(字林報)』의 기자 천홍밍(陳漢明)의 소개로 처음 쑨원(孫文)을 만났다. 1918년 여름 상하이 고려민친목회(高麗民親睦會)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회장은 신석우(申錫雨)였으며, 이는 상해교민단(上海僑民團)으로 발전하였다. 1918년 8월 19일 평북 선천(宣川)에서 개최된 제14회 장로교회 총회에서 이강훈, 이상재(李商在) 등을 만나 국제 정세와 전후처리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1918년 11월 28일 장덕수(張德秀), 조동호(趙東祜), 김철(金澈),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터키 청년당을 모방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New Korean Young Men’s Association)을 조직하였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터키청년당원 아멜 베이(Armel Bey) 등으로부터 터키청년당의 조직과 활동을 듣고 이를 참조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조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개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18년 11월 27일 윌슨대통령 특사로 중국을 방문한 크레인(Charles Crane)과의 면담이었다. 29일 직접 크레인에게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고, 같은 청원서를 상하이에서 『밀러드리뷰(Millard Review)』를 간행하던 밀러드(Thomas F. Millard)에게도 건넸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초에 조직이 확정되어 김규식(이사장), 서병호(서무부 이사), 김인전(재무부 이사), 여운형(교제부 이사)의 체제로 운영되었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텐진(天津)에 있던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빙해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결정한 후 모금하였다. 자금 모집 후 탕사오이(唐紹儀), 쉬첸(徐謙) 등과 파리에서의 외교활동, 여권발급 문제를 논의하고 쑨원을 재차 면담하였다. 중국대표단의 일원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정위슈(鄭毓秀)의 도움으로 배표를 구하였고, 김규식은 진충웬(金仲文, Chin Chung Wen)이라는 중국이름의 여권을 갖고 1919년 2월 1일 파리로 출발하였다. 이어 신한청년당의 선우혁 ・ 김철 ・ 서병호 등을 국내로 잠입시켰고 장덕수, 여운홍은 일본을 거쳐 다시 국내로, 자신은 간도 ・ 시베리아로 들어가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사실과 독립운동 전반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주간 체류하면서 이동녕(李東寧), 문창범(文昌範), 박은식(朴殷植), 조완구(趙琬九), 정재관(鄭在寬), 강우규(姜宇奎) 등과 회견하며 독립운동의 호기(好機)가 도래(到來)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이어 시베리아 체코군 사령관 가이다(Radola Gajda) 장군과 회견하고, 미 ・ 영 ・ 캐나다 3군사령부를 방문한 뒤, 3월 6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본래는 직접 파리로 향할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동생 여운홍이 대신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입법기관으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경기도 의원으로 출석하였으며,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다. 정부 수립보다는 독립운동가 정당 건설을 선호하였고, 이것이 간도 ・ 시베리아 한인들의 노선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외무위원장 ・ 외무차장 ・ 외무부위원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상해교민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거류민을 국민군으로 편성하기 위해 상하이 한인들에게 군적에 등록할 것을 권유하였다. 교민 아동 교육을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敎)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하였다. 전신은 1917년 출범한 상해한인기독교소학교였다. 5월 14일 일본 경찰이 숙소를 습격하였으나 화를 면하였다. 1919년 일본 조합교회(組合敎會)를 매개로한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장덕수, 최근우(崔謹愚), 신상완(申尙玩)을 동반하고 3주 동안 일본 도쿄(東京)를 방문(1919. 11. 18~12. 1)하였다. 고가렌조(古賀廉造) 척식국장관,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상(陸軍相),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총독부 정무총감, 도코나미 다케지로(床次竹二郞) 내상(內相), 노다 우타로(野田卯太郞) 체신상(遞信相),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 등과 회담하였는데, 일본의 위협과 자치제 제안을 공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창하였다. 제국호텔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이 세계의 대세이자 신의 뜻이며 한민족의 각성이며, 한국의 독립이 한국의 생존권이자 인간 자연의 원리”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확실히 한 가지 범하지 못할 정의의 섬광”이 있다고 평하였다. 일본 방문시 일제는 이를 이용하여 귀순시키거나 자치론 동조자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오히려 한국독립운동에 역이용한 것이었다. 귀환 후 임시정부는 「국무원포고」를 통해 여운형 등의 일본행이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고 선언하여 일본행을 둘러싼 논쟁을 잠재웠다. 1920년 봄 김만겸(金萬謙)의 소개로 러시아공산당이 파견한 보이틴스키(Grigori Voitinsky)를 만나 공산당에 관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중국과 일본의 천두슈(陳獨秀) ・ 오스기 사카에(大衫榮)를 함께 만났다. 1920년 4~5월 포타포프(A. S. Potapov)와 함께 푸젠성(福建省) 장저우(漳州)에서 천중밍(陳炯明)과 만나 시베리아에 한인군관학교 설립과 부대양성을 위한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방안을 협의하였다. 1920년 이동휘(李東輝)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참가해 중앙위원과 번역부 일을 맡았다. 레닌자금 40만 루블을 둘러싼 대립 이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옮겼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한국인 최초로 번역하였고, 부하린(Bukharin)의 『공산주의독본』, 영국노동당의 『직접행동』등을 직접 번역해 만주와 국내에 배포하였다. 1920년 8월 황진남(黃鎭南), 장덕수 등과 함께 베이징에 온 미국의원단을 방문해 한국독립에 대한 원조와 지원을 요청하였다. 1921년 상하이에서 광둥정부(廣東政府) 사법부 차장이던 우산(吳山), 임시정부의 김규식 ・ 조동호 ・ 윤현진(尹顯振)과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해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한중 연대를 추진하였다. 중한호조사의 출발은 1919년 4월 상하이 프랑스조계 중국인 황지에민(黃介民) 사무소에서 조동호, 여운형, 여운홍이 함께 하며 시작되었다. 1921년 안창호 등과 함께 국민대표자대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 8월 안창호 지지파로 몰려 4인조 테러단에게 습격당하였다. 1925년 12월에는 중국군 출신 7인조에게 테러 습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1~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대표 54명 중 한명으로 참석하였다. 1921년 가을부터 상하이 ・ 텐진에서 대회 준비를 맡아 각국 대표의 여권 수속을 담당하였다. 장자커우(張家口) ・ 몽골 울란바토르 ・ 이르쿠츠크를 경유해 1922년 1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이르쿠츠크파 대표로 참석하여 김규식, 김원경, 김단야(金丹冶)와 함께 대회운영 의장단에 뽑혀 개회식 연설을 하였다. 모스크바에서 두 차례 레닌을 만났으며 지노비예프(Alexandre Zinoviev), 트로츠키(Leon Trotskii) 등 러시아공산당 지도자들과도 만났다. 일본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 가타야마 센(片山潛)을 만나 한 ・ 일 연대와 국제연대를 논하였다. 1922년 3월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1922년 10월 김구, 조상섭, 이유필, 손정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는데 10년 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고 5만원 이상의 전비(戰費) 조성을 목적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였다. 같은 해상하이의 사립 동방대학(東方大學) 영문교사로 취직하였다. 1925년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 카라한(Lev M. Karakhan)을 만나 중국혁명운동 동참을 요구받고 국공합작(國共合作)에 일조하였다. 1917과 1919, 1924년 여러 차례 쑨원과 만난 바 있어 쑨원의 개인 고문이자 동지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포타포프, 카라한, 보로딘(Mikhail M. Borodin) 등을 쑨원에게 소개해 국민당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에 영향을 끼쳤다. 쑨원의 권유로 국민당에 입당하였고, 쑨원의 심복인 취추바이(瞿秋白)의 추천으로 중국공산당의 당원 대우를 받았다. 마오쩌둥(毛澤東)과도 수차례 만났다. 1925년에는 상하이에서 타스통신의 촉탁으로 일하는 등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에 모두 가담한 한국인이었다. 1926년 1월 광둥(廣東)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2회 전국대표대회에서 여광(呂光)이란 이름으로 「중국 국민혁명의 전세계적인 사명」이란 제목으로 영어연설을 하였다. 1926년 1월 장제스(蔣介石)를 만난 이래 한인 청년들의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입교를 소개하였고, 광저우(廣州)지역 한인 청년들로 공산주의청년단(Communist Youth League of china)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북벌로 우한삼진(武漢三鎭)을 점령한 1926년 9월 한커우(漢口) 승첩 경축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 북벌 당시 모스크바사관학교 졸업생 홍의표(洪義杓) 등 한국 사관 15명을 이끌고 광둥으로 가서 이미 혁명군에 가담한 한국인 30여 명과 함께 한커우까지 진출하기도하였다. 중국이 국공합작을 통해 혁명에 성공한다면, 한국 독립운동에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1927년 장제스의 4 ・ 12정변 이후 바이충시(白崇禧) 군에 체포되었다 탈출하였다. 1928년 봄 상하이 푸단대학(復旦大學)에 취직해 체육교사로 일하였다. 1929년 5월 대학 축구부를 이끌고 자바 ・ 수마트라 ・ 말레이 ・ 필리핀 등지로 원정경기에 나가 30여 차례 싱가포르 해방, 필리핀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다 현지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29년 7월 10일 상하이경마장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다 일본영사경찰에 체포되어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국내로 압송되었다. 1930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150일 본형산입)을 받았고 같은 해 6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대정8년 제령 제7호」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원심 미결구류일수 150일 본형산입, 당심 미결구류일수 41일 본형산입)을 선고받았다. 1929년 7월부터 옥고를 치르다가 형기만료 4개월을 남기고 1932년 7월 26일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제1차 투옥이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조선총독으로부터 농촌진흥운동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33년 2월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말소사건(1936. 8. 13)을 처음 일으켰다. 이 사건 등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 후 1937년 폐간하였다. 손기정은 그의 둘째 아들 여홍구(呂鴻九)와 양정고보(養正高普) 동창이었다.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에 추대된 후 1937년 해산 시까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생들에게 운동정신을 통한 애국심 고취, 단결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1935년 충남 아산에 위치한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를 재건하고 공덕비를 건립하였고, 김구의 모친 곽낙원(郭樂園)과 아들 김인(金仁), 김신(金信)이 상하이로 탈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金性洙), 이만규(李萬珪) 등에게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다고 예견하였고, 1938년 조선 총독의 비서,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 유조(長崎祐三), 윤치호(尹致昊) ・ 한상룡(韓相龍) 등의 전쟁 협조 요구를 거절하였다. 1939년 6월 이상백(李相伯)을 통해 임시정부와 연계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5차례 일본을 방문해 고위급 인사들과 접촉하여 정세를 파악하고 고급 정보를 획득하는 한편 유학생들을 규합해 해방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중국정계의 거물들과 친밀한 데 주목한 일본은 친일 회유와 대중국 화평공작을 권유하였으나 모두 거부하였다. 1940년 2월 조선군 참모부의 요구로 왕징웨이(汪精衛)와의 교섭을 의뢰받았고, 3월 육군성 병무국장 다나카 다카요시(田中隆吉) 소장으로부터 장제스, 왕징웨이와 만나 화평공작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도쿄에서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수상,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전 조선총독 등과도 회견하였다. 둘째 딸 여연구는 이때 아버지가 도쿄에서 천황을 만났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였으며, 이정구(李貞九)에게 식량조사와 대책을, 장권(張權)에게 치안대 조직을 연구하게 하였다. 1942년 12월 일본에서 귀국하는 도중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경성헌병대에게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1942년 4월 18일 미군의 일본 도쿄 공습을 목격하며 일본군 비행기가 미군 비행기를 요격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일본의 패망과 한국독립의 필연성을 친구들에게 역설한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투옥되었다. 2차 투옥이었다.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1943년 7월 2일 가석방되었다. 이 직후 경성요양원에 입원하였고, 요양을 핑계로 김용기(金容基)가 농촌운동을 벌이던 경기도 양주군 봉안(奉安)에 은거하며 동지 연락과 청년지도에 전력하였다. 1943년 8월 10일 경성요양원에서 조동호, 이상도, 이상백, 최흥국, 구소현, 전사옥 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朝鮮民族解放聯盟)을 결성하고, 중앙과 지방의 조직 건설에 착수하였다. 1943년 11월 학병지원 연설, 대동아전쟁 강연회 등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였다. 1944년 1월 봉안에서 만주군 소속이던 박승환(朴承煥)과 만나 군사조직 문제를 논의하였다. 박승환은 만주군 내 건국동맹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1944년 4월 거짓환갑잔치를 열고 조선건국동맹 조직을 위한 예비모임을 가졌다. 1944년 8월 10일 현우현(玄又玄)의 삼광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민족해방연맹의 조직 ・ 정보연락 ・ 대책연구 등 3부문으로 준비한 횡적 조직이 건국동맹으로 강화 ・ 발전한 것이다. 건국동맹은 현우현, 황운, 이석구, 김진우, 조동호 등 좌익계 노장층이 중심이 된 비합법 비밀결사로 항일투쟁과 건국준비를 목표로 삼았다. 1944년 10월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구축, 연합국과의 연대, 민주주의원칙 등 3가지 강령을 채택하고, 건국동맹에 대해 일체 말을 하지 않는다(不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不文),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不名)는 3원칙을 규약으로 채택하였다. 건국동맹의 중앙과 지방조직 결성에 착수하였고, 10월 8일 경기도 용문산에서 경기 북부지방 농민동맹을 조직하였다. 자신을 위원장으로 내무부 ・ 외무부 ・ 재무부 3부 및 전국 각도 대표최고위원이 결정되었다.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가 봉안에 와서 중국행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보광당(普光黨) ・ 조선민족해방협동단(朝鮮民族解放協同團) ・ 산악대(山岳隊) 등 학병 ・ 징병 ・ 징용 거부자 조직과 연계하는 한편 노동자 ・ 부녀자 ・ 사무원 조직을 준비하였다. 미 ・ 일 개전(開戰)이라는 결정적 시기를 맞아 국외에서 연합군과 공동작전으로 독립운동 무장세력의 국내진공작전이 계획 중이었고, 국내에서는 이에 맞춰 무장폭동을 계획하였다. 1945년 3월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 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하였다. 또한 손기정을 통해 경기도 주안 조병창(造兵廠)의 채병덕(蔡秉德) 중좌와 두 차례 접촉해 무기공급 등을 논의하였다. 1945년 5~8월 사이 연락원을 파견해 베이징 ・ 옌안(延安) 등지에서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 ・ 임시정부 등과 조직적 연계를 시도하였다. 북만주에는 최근우(崔謹愚), 베이징에는 이영선(李永善) ・ 이상백 ・ 박승환 ・ 엄태섭(嚴太燮), 옌안에는 이영선 ・ 이상백 ・ 박승환 등을 파견하였다. 건국동맹과 독립동맹은 14차례 이상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고, 독립동맹은 건국동맹을 국내 분맹(分盟)으로 인식하였다. 1944년 6월에는 독립동맹 적구공작반(敵區工作班)이 공작원 1인을 직접 서울의 그에게 파견하였으나, 그의 불신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독립동맹과의 연락은 이영선과 김명시(金明市)의 접촉을 통해 구체적으로 시도되었으며, 유엔 건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회담(1945. 5)과 관련해 옌안에 대표 파견을 시도하였다. 임시정부와의 접촉은 최근우를 베이징에 파견해 시도하였다. 독립운동자대표대회가 해외에서 개최되면 이에 참석할 계획을 갖고있었다. 건국동맹은 광복 직전 좌우가 연합한 민족통일전선이었으며, 해방과 건국을 준비하는 조직이었다. 해방 당일 총독부와 5개조에 합의한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위원장이 되었으며, 이후 1945년 8월말까지 전국 145개 시 ・ 군에 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만들어졌다. 건국준비위원회는 건국동맹을 기초로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이 테러로 와병 중일 때 급조된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1945~47년간 조선인민당 ・ 사회노동당 ・ 근로인민당 당수를 지냈으며, 1946~47년간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다. 남한에서 좌우합작을 성공한 후 이를 남북연합으로 연결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 ・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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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3년 원심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30-06-09 국가기록원
2 인물카드 - - - - 국사편찬위원회
3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징역3년 경성지방법원 -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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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합동묘역 서울 수유 국가관리묘역 서울특별시 강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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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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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옛 사옥 서울특별시 종로구
2 기념관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경기도 양평군
3 장소 묘골애오와 공원 경기도 양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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