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함남 단천(端川) 사람이다.
이동휘(李東輝)의 실부(實父)로서 빈궁한 농민으로 출생하였다. 1902년 이동휘(李東輝)가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근무하게 되자 서울로 이사오게 되었으며, 서울에서 보성각에 취직하여 새로 창립되는 신학교들의 한문교과서를 친히 편집 발행하였다. 아울러 대한매일신보의 직원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10년 이후 며느리인 이동휘의 부인 강정혜와 셋째 손녀 이경순, 손자 이우석 등과 함께 훈춘(琿春)에 살았으며, 1915년에는 이동휘의 의견에 따라 왕청현(汪淸縣) 하마탕의 조선인 촌락에 거주하였다. 1917년 늦은 봄에 목릉현(穆稜縣) 팔면통(八面通)에 이주하였다가 그 후 다시 1918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블라디보스톡에서 46세 이상의 남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원조할 목적으로 김치보(金致寶)·윤여옥(尹餘玉) 등과 함께 노인단(老人團)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노인단의 비밀회의에서 자신의 결심의지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나는 지금 70이 가까운 노인으로 죽는 것이 두렵지 않으며,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우리민족의 애국심을 더욱 고취시키기 위하여 조선 내지에 나가서 다시 한번 더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민중을 격동시키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선동, 선전하는 선포문을 민중 대중 속에 선포하겠다.
이에 노인단에서 찬동하여 이름을 이발로 고치고 서울로 향하였다. 1919년 5월 31일 아침 동지 4명과 함께 노인단의 대표로 경성에 가 종로동 보신각(寶信閣) 앞에서 각자 휴대했던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작은 칼로 자기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하자 일경은 이발 외 2명을 간곡히 설유하여 귀환케 하였다.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국민회 주최로 독립선언 기념축하식을 개최하고자 할 때 회장으로 선정되었으며, 부회장은 김식(金軾), 의식부장에 장도정(張道政), 경찰부장에 김필수(金弼秀), 재무부장에 김치보, 접대부장에 미하일 김 등이었다. 그는 3월 1일의 행사시 배포된 인쇄물에 이발의 호소를 게재하였으며 재러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였다.
이처럼 노구에도 불구하고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1920년 어느 날 새벽 1개소대를 파견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그 후 그는 석방되어 동년 둘째 손녀 의순과 함께 상해로 이사하였다가 1923년 이동휘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할 때 함께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였다.
1928년 4월 20일 블라디보스톡에서 77세의 나이로 아들 이동휘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망시 대한독립만세를 유서로 남겼으며, 이 유서는 선봉신문 1928년 5월 6일자에 게재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116·298면
- 한국학연구(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3. 70 제5집 별집, 리동휘 성재선생(리영일) 174·184·188·204·207·289∼290·291∼293·306면
- 선봉(1928. 5. 6)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1집 8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19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제4권 39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82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46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