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대종교인으로 1945년에 옥중에서 순국한 인물이다.
대종교(大倧敎)는 구한말 나철(羅喆)에 의해 창시된 이후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대종교 신자들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신민부(新民府) 등 주요 독립운동단체들의 주역으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종교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만주를 지배하게 되자 항일종교로서 인정되어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대종교의 3대 교주인 윤세복(尹世復) 등은 일제에게 대외적으로 순종하는 척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만주국에 의하여 어느 정도 공인된 종교활동을 보장받게 되었다. 이에 윤세복은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교적을 간행하여 널리 반포하기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대종교 계통의 대종학원을 설립, 초등부와 중등부를 운영하여 항일 민족교육을 은밀히 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천진전(天眞殿)을 건축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대종교의 이러한 활동에 대하여 일제 측은 밀정을 파견하여 항상 내사하는 한편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 조선총독부 촉탁인 밀정 조병현(趙秉炫)으로 하여금 대종교 내부의 실태와 간부의 언동 등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 만주국의 사찰은 만주국의 치안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일환으로 식민지 내부의 항일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려는 정책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구체적인 단서가 잡히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러한 때인 1941년 5일 국내 조선어학회 사건의 중심인물인 이극로(李克魯)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이 편지 안에는 "널리 펴는 말"이라는 글이 동봉되어 있었다. 일제는 이를 일문으로 번역하되 제목을 "조선독립선언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용 중에 있는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등의 구절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날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구실로 대종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이 글을 빌미로 1942년 11월 19일 국내에서의 조선어학회 간부 검거 사건과 때를 같이 하여 조선과 만주 각지에서 윤세복 이하 다수의 대종교 지도자들을 검거하였다. 이 때 이재유는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자택에서 체포되었는데 이 시기에 함께 체포된 동지는 24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즉시 영안현 경무과에 설치된 특별취조본부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 약 4개월 동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이재유 등 대종교지도자들은 1943년 3월 말경에 목단강(牧丹江) 경무처와 액하(掖河) 감옥에 이감되어, 3개월 동안 목단강성(牧丹江省) 경무청 특무과에서 취조를 당하였다. 그리고 동년 7∼9월에는 목단강 고등검찰청에서 취조를 당하였다.
이처럼 2년여의 취조와 감옥 생활에서 대종교 지도자들은 수많은 고통과 고문을 당하였던 것이다. 특히 굶주림과 추위는 늙고 병든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이었던 것이다.
이재유는 1944년 5월 7일(양력 6월 26일) 5년의 도형(徒刑)을 받은 후 병으로 보석되어 집에서 요양하였다. 그러다 다시 길림감옥(吉林監獄)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3월 10일 옥사 순국하였다.
당시 이재유와 함께 순국한 인물로는 오근태(吳根泰)·안희제(安熙濟)·나정연(羅正練)·김서종(金書鍾)·나정문(羅正紋)·강철구(姜鐵求)·이창언(李昌彦)·권상익(權相益)·이정(李楨) 등을 들 수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8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800∼80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32면
- 임오십현순교실록(대종교총본사) 30·3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