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전북 (全北) 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 를 치렀고, 1922~1924년까지 일본 (日本) 에서 북성회 (北星會) 와 일본조선노동총동맹 (日本朝鮮勞動總同盟) 등을 조직하고 간부로서 활동하였으며, 1924년 무렵 국내로 돌아와 사상단체와 노동단체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였고, 1925년 조선공산당 (朝鮮共産黨) 에 참여하였다가 파벌투쟁으로 정권되었으며, 1925년 상해 (上海) 로 건너가 ML파 간부로서 상해 (上海) , 길림 (吉林) , 하얼빈 등에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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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고(獄苦) : 옥살이를 하는 고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이상규는 1920년 전북(全北)에서 신헌(辛憲)·조기담(趙紀淡)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애국금 모집위원 이의(李儀) 등과 공모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었다. 1921년 3월 28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전주지청(全州支廳)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懲役)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1922년 5월 4일 출옥하였다.
1922~1924년까지 일본에서 북성회(北星會),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동경조선노농동맹회(東京朝鮮勞農同盟會), 재일본조선무산자청년회(在日本朝鮮無産者靑年會) 등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국내로 들어와 북풍회(北風會)에서 활동하였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참여하였다.
1925년 상해(上海)로 건너갔으며, ml파 간부로서 상해(上海), 길림(吉林), 하얼빈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만주국이 들어서자 전만조선인청년연합회(全滿朝鮮人靑年聯合會)를 조직하여 친일기관인 협화회(協和會)와 일제에 대해 합법적인 투쟁으로 저항하였다. 광복 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결성에 참여하여 노동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在京 朝鮮人 狀況(1924. 5. 31) 朝鮮人에 대한 施政關係雜件 一般의 部 2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判決文(光州地方法院 全州支廳:1921. 3. 28)
- 判決文(大邱覆審法院:1921. 12. 26)
- 要視察鮮人의 언동에 관한 건(1925. 7. 24)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 2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3집 13, 16~17, 20, 22, 26, 28, 30, 33~35, 38~39, 52, 55~57면
- 고등경찰요사(경상북도경찰부, 1934) 158~16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4집 774~775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6집 161면, 별집 7집 34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387면
- 조선독립운동(김정명) 3권 542, 545~548, 550, 554~556, 559~560면
- 國外容疑朝鮮人名簿 3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