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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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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朴基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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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만주(滿洲) 유하현(柳河縣)에 근거를 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단원(團員)으로 1920. 8월 국내로 진입하여 황해(黃海) 은율(殷栗)에서 친일파(親日派) 최병혁(崔丙赫)처단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으며, 동년(同年) 9월 10일 황해(黃海) 신천군(信川郡) 초이면(草里面)에서 일경(日警)의 습격을 받아 교전(交戰)하다가 이명서(李明瑞), 박기수(朴基洙), 원사현(元士賢), 이지표(李芝杓)와 함께 전사 순국(戰死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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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황해도 연백(延白) 사람이다.

1920년 8월 만주 유하현(柳河縣)에 본부를 두고 있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 박기수와 함께 활동한 대한독립단의 주요 간부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참모 송상규(宋尙奎)·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부총무부장 강유상(康有常), 총무원 김 일(金鎰)·한관모(韓寬模),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재무 이병기(李炳基), 회계 홍 주(洪疇), 사법부장 이웅해(李雄海),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 선전부장 변창근(邊昌根) 등이다.

박기수가 활동한 대한독립단은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본부 및 국내, 서간도의 각 지단에 재무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아울러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독립군의 양성에도 힘썼다. 그리고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양성을 통하여 국내에 진공하여 무력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한독립단의 이러한 계획에 따라 박기수는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재만동포들이나 국내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대한독립단의 이러한 계획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박기수는 대한독립단 단원으로 1920년 음력 5월 중 관전현(寬甸縣)에서 대한독립단 총장 양기하로부터 황해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이 운동을 방해하는 자는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년 6월 19일 박천(博川)에 도착하여 박중서(朴重緖)와 변춘식(邊春植)을 입단시켰다. 그리고 1920년 8월 7일 대동군(大同郡) 용산면에서 원장(院場) 경찰관 주재소 순사 삼본 춘평(森本春平)이 검문하자 이지표(李芝杓) 등과 함께 그를 사살하였다.

한편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 이명서(李明瑞)를 중심으로 동군 출신의 김정욱(金貞郁)과 해주 출신의 민양기(閔良基), 연백 출신의 변춘식(邊春植)·이근영(李根永)·주의환(朱義煥)·원사현(元士賢)·박중서(朴重緖) 등 독립단 일행과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숙청의 임무를 띠고, 황해도 은율군(殷栗郡)으로 진입하였다. 여기서 은율군의 애국지사 김난섭(金蘭燮)·홍원택(洪元澤)·박능묵(朴能默)·박형진(朴炯鎭)·이현규(李鉉奎) 등과 함께 8월 15일 밤 친일군수 최병혁(崔丙赫)을 처단하였다.

그 후 송화(松禾)·장연(長淵) 등을 거쳐, 8월 24일에는 해주군으로 가 이항진(李恒鎭)집에 도착하여 황해도 지단의 이성룡(李成龍)을 만나 독립운동의 전개 및 군자금 모집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한편 김창현(金昌鉉)·최명현(崔明鉉) 등 독립단 간부들은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지원 방법을 토의하였으며, 금품을 모아 그들의 활동을 도왔다.

1920년 9월 10일 독립단 대원들과 함께 신천군(信川郡) 초리면(草里面) 도명리(道明里)에 있는 구월산(九月山)으로 이동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던 중 연락을 취하여 주던 종산(鍾山)교회의 목사 우종서(禹鍾瑞)가 일경이 보낸 첩자에게 속아 근거지가 밝혀지게 되어 다수의 일경에게 습격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원들과 함께 교전하여 일경 2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결국 박기수는 동지 이지표·원사현·주의환·이근영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340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258·259면
  • 동아일보(1921. 7. 20)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0집 1227·1228·123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기수 - 황해 연백(延白) 구월산전투
본문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서 태어났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는 확인할 수 없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1920년 9월 10일 사망 당시 본적지는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장곡면(壯谷面)이며, 당시 나이는 37세로 1884년생으로 추정된다. 만주 이주 시기와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경위 등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단원과 구월산대(九月山隊) 대원으로 활동하며, 친일협력자 처단과 일제 기관 공격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대한독립단은 항일의병 출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보약사(保約社)와 농무계(農務契)·향약계(鄕約契)·포수단(砲手團) 등의 단체들이 통합하여 1919년 4월 15일 중국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이다.1920년 6월 대한독립단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로부터 황해도 등지를 무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방해하는 자는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파견대장 이명서(李明瑞)와 주의환(朱義煥)·이근영(李根永)·이지표(李芝杓)·원사현(元士賢)·고두환(高斗煥) 등과 펑톈성 콴뎬현(寬甸縣)을 출발하였다.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과 의주군(義州郡) 사이의 압록강을 건너 삭주군 부근에 진입한 파견대는 동지를 모은 뒤 구월산대를 결성하였다. 구월산대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대한 무장 단체 중의 하나였다. 1920년 8월 7일 오후 9시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용악교(龍岳橋) 부근에 도착하였다. 이때 이지표 등과 불심검문하는 일본 순사 모리모토(森本春平)를 처단하고 진남포(鎭南浦)로 피신하였다가 황해도 은율군(殷栗郡)으로 진입하였다.은율군에 도착한 파견대는 그곳 주민들과 합세하여 친일파와 일경주재소를 공격키로 하였다. 8월 15일 1개 대는 은율군수 최병혁(崔炳赫)을, 1개 대는 은율군 참사(參事) 고학륜(高學倫)을 처단하고, 1개 대는 은율경찰관주재소를 습격키로 결정하였다. 최병혁은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시위대 앞에 나서 일본을 따를 것을 호소하며 독립운동을 방해하였고 이후에도 노골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인물이었다. 이때 은율경찰관주재소 습격대로 편성되었다.군수 관사를 습격한 이지표 등은 최병혁 사살에 성공했지만, 고학륜은 미리 알아채고 도주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재소습격대는 주재소를 포위 습격하여 전선을 끊어 통신을 차단시켰다. 이때 은율경찰관주재소 뒷문에 잠복하고 있다가 최병학과 고학륜의 집에서 들리는 총성을 듣고 뛰어나오는 순사 야마이(山井喜六)를 향해 총을 발사하였으나, 처단에는 실패하였다.거사 후 파견대는 신천군·송화군 등을 거쳐 8월 24일 도청 소재지인 해주군(海州郡)에 도착하여, 대한독립단 황해도지단의 이성룡(李成龍)·김창현(金昌鉉) 등과 향후 활동 방안을 논의하였다. 일제의 비상 경계가 펼쳐진 상황에서 파견대는 구월산 방면으로 방향을 돌려, 9월 초 신천군 초리면(草里面) 도명리(道明里)로 들어갔다. 만일의 경우 입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기에 편리하였기 때문이었다.그 해 9월 10일 산 아래에서 연락을 취하던 우종서(禹鍾瑞)가 사복 경찰에게 속아 파견대의 근거지가 노출되어 일제 경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중과부적인 일본군에 포위된 대원들은 유일하게 소지한 무기인 권총으로 적을 상대하며 접근전으로 전투를 치렀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4~5시간의 전투를 벌이며, 일제 경찰 20여 명을 사살하며 항전하였다. 이를 세칭 ‘구월산전투’라고 한다. 항전 끝에 동지 주의환·원사현·이지표·이근영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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