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9년 6월 「
3.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사건이 발생되자 광주고보 선두에서 시위활약(항일운동사 p112)
하다가 체포되여 금고 4월형을 받음(판결등본제출)
4. 1930년
형을 받았음(판결등본, 동아일보 1930. 10. 11, 10. 19)
- 복역(服役) : 징역을 삶.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남 광양(光陽) 사람이다.
1926년 11월 3일 왕재일(王在一)·장재성(張載性) 등이 중심되어 조국의 독립과 사회과학연구를 목적으로 항일학생결사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한 후 광주학생들은 항일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중 그 주동 학생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1928년 10월 김보섭(金普燮)과 함께 당시 광주읍내에 있던 김시성(金時成)의 하숙집에서 김몽길(金夢吉)·여도현(呂道鉉) 등과 만나 항일운동 방안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그후 이들은 회합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하면서 동지 규합에 힘써 1929년 6월경에는 회원이 20여명에 달하였다.
이 무렵 동경(東京)에서 돌아온 장재성이, 성진회 해체 이후 분산적인 활동을 지양하고 조직적으로 활동할 것을 주장하여, 광주시내 각학교 학생지도자들은 김기권(金基權)의 하숙방에 모여 비밀결사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부서도 정하였는데 그는 김보섭과 함께 조사선전부원으로 선임되어 동지의 모집 및 선전 활동의 일을 맡았다.
한편 〈독서회중앙본부〉는 독서회원의 목적 수행을 위한 재정활동으로 소비조합 설치를 계획하는데 그는 장재성 등과 독서회중앙본부의 임원들과 수차에 걸쳐 모임을 갖고 의논하여 동년 9월에 소비조합을 설치하였다.
이에 앞서 동년 6월에는 광주고보생 20여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광주고보독서회를 조직하였으며, 그는 동회의 대표 겸 조직교양부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이렇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활동하다가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독립운동 때에는 학생들을 지휘하여 농구실(農具室)을 때려부수고 삽·괭이·목봉 등을 꺼내어 광주고보 가두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활약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금고 6월,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 받았다.
또한 광주학생 독서회 관련에 대해서는 다시 주동자로 지목되어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피검된 학생 중 최고형인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0. 2. 26 광주지방법원)
- 판결문(1930. 5. 15 대구복심법원)
- 판결문(1930. 10. 18 광주지방법원)
- 기려수필 39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8면
- 동아일보(1930. 10. 10, 10. 11, 10. 19)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459·494·598면
- 판결문(1931. 6. 13 대구복심법원)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17·72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40·247·251·263·1512∼1524·1611∼1624·1633∼1654·1667∼17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