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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14
성명
한자 權愛羅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관련정보


2023년 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 3.1 경기도(京畿都) 개성군(開城郡) 송도면(松都面)독립 만세운동 시위(獨立萬歲運動示威)어윤희(魚允熙)와 함께 주동자(主動者)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6월을 받았으며, 1920.7.9에는 서울 시내(市內) 여러교회(敎會)에서 애국사상 고취(愛國思想鼓吹)를 위한 강연(講演)을 하여 종로경찰서(鐘露警察署)구금(拘禁)사실(事實)이 있을뿐아니라 1922.1월 노국(露國)에서 개최(開催)극동인민대표회의(極東人民代表會議) 한민족여성대표(韓民族女性代表)참석(參席)하는 등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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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기도 개성(開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호수돈여자보통학교(好壽敦女子普通學校) 부설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어윤희(漁允熙)와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그의 손에 독립선언문이 전해지며서 추진되었다. 그는 이 선언서 80여 매를 호수돈여자보통학교에서 어윤희에게 넘겨주어 주요인사에게 배부하였고,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운동가와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는 시작되었다. 이 만세시위 행렬에 억눌렸던 일반민중도 호응하게 되자 일경이 동원되어 그를 비롯한 많은 주도인사들이 붙잡혔다.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6월형을 선고받았고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9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도 독립운동에 관련된 일에 힘써왔는데 1920년 4월 25일~5월 27일 동안 6회에 걸쳐 수표교(水標橋) 예배당을 비롯하여 정동(貞洞) 예배당에서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의 제목으로 한국여성의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강연을 몇차례에 걸쳐 시도하다가 이해 7월 9일 종로(鐘路) 경찰서에 구금되었고 1922년 1월에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極東人民代表會議) 한민족 여성 대표로 참가하여 당시 민족대표 여운형(呂運亨)·나용균(羅容均) 등과 함께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9년에는 중국 소주(蘇州) 경해여숙대학(景海女塾大學)에서 수학하면서 상해(上海)를 중심으로 여성지위 향상과 조국광복운동에 활약하였고 이후 동삼성(東三省)에서 지하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42년 4월에는 길림성 시가둔(吉林省 施家屯) 영신농장(永新農場)에서 아들 김봉년(金峰年)과 함께 일제 관동군 특무대에 붙잡혀 1년 이상 비밀감옥에서 고문취조를 받은 다음 장춘고등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장춘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7. 4 京城覆審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89面
  • 嶺南日報(1968. 5. 19, 1975. 5. 19)
  • 韓國日報(1973. 10. 26)
  • 東亞日報(1920. 4. 25, 5. 13, 5. 17, 5. 19, 5. 25, 5. 27)
  • 判決文(1919. 5. 30 京城地方法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애라 - 경기도 강화(江華) 개성 3.1운동
본문
1897년 2월 2일에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교동면(喬桐面)에서 태어났다. 이후 옮겨간 개성에서 자랐고 호수돈여학교에서 초등과와 중등과를 졸업하였다. 1914년 서울 이화학당(梨花學堂) 보육과에 입학해 1917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한 뒤 호수돈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개성 북부교회에서 유치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화영(吳華英)이 독립선언서를 개성 지방으로 전달하였다. 이를 전해 받은 남감리파 전도사 김지환(金智煥), 목사 강조원(姜助遠), 호수돈여학교 서기 신공량(申公良) 등은 독립선언서를 어윤희(魚允姬), 신관빈(申寬彬)에게 전달하여 3월 1일 개성 시가지에 배부하였다. 독립선언서 배포의 영향으로 3월 3일 개성에서는 호수돈여학교 학생들과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 행진을 시작하였고 약 2,000명이 넘는 인원이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제7조와 조선형사령 제42조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 여옥사에서 유관순(柳寬順), 어윤희, 신관빈, 김향화(金香花), 심명철 등과 함께 옥고를 겪었다. 출소한 이후 서울 도렴동 종교교회에 머물면서 연동교회, 중앙청년회관 등지에서 여자교육회 주최의 강사로 시국 강연을 하였고, 1920년 6월 6일 승동교회에서 최덕규·김영신·이남규·최종환 등과 함께 반도청년웅변학회 발기위원이 되었다. 독립군 자금 모집에 관여한 혐의로 1920년 7월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22년 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국 여성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때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과 만나 결혼하였다. 국내로 돌아와 1922년 10월 여자 강연 대회에서 자유 연애, 여성 단발 문제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하며 여성 지위 향상에 노력하였다. 1926년 1월 21일에 개최된 단발가부(斷髮可否) 토론회에서 단발 부인의 입장에서 의견을 개진하였다. 1929년 중국 쑤저우(蘇州) 경해여숙대학(景海女塾大學)에서 수학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이어갔다. 1942년 4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시가둔(施家屯) 영신(永新) 농장에서 아들 김봉년과 함께 관동군 특무대에 체포되어 장춘형무소에서 다시 옥고를 겪었다. 수감 중이던 1945년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남편 김시현의 정치적 동지로서 활동하였고 1967년 안동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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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1919-05-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원판결 취소) 경성복심법원 1919-07-04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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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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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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