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동하였다. 전명근이 활동한 이 단체는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군사정부인 군정부(軍政府)가 동년 11월 17일 임시정부에 소속하는 단체로 개편되면서 그 이름을 개칭한 것이다.
서로군정서는 독판제(督辦制)에 의해 운영되었다. 즉 최고지휘부인 독판부 아래에 무장활동을 담당하는 사령부·참모부·참모처 등을 두었으며, 이를 보조해주는 기관으로 정무청·내무사·법무사·재무사·학무사·군무사 등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들 각 부서는 독판(督辦) 이상룡, 정무총장 이탁, 내무사장 곽문(郭文), 재무사장 남정섭(南廷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이청천(李靑天) 등이 담당하였다.
전명근이 활동한 서로군정서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은 40대의 장년층이 그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신민회(新民會)의 독립전쟁론에 의거하여 만주지역으로 정치적인 망명을 한 인물들이었다.
서로군정서에서는 조직 이후 출신인사들이 많은 평안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으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치하고, 유하현 고산자 하동(河東)지역에 40여 간의 광대한 병사와 수만 평의 연병장을 부설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 전명근은 의용군(義勇軍)에 소속되어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소속도어 활동한 이 의용군은 1914년 통화현에서 무장부대인 백서농장(白西農莊)을 운영하던 채찬(蔡燦)·신용관(辛容寬)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 후 채찬·장기초(張基礎) 등에 의하여 세력이 확충되어 병력이 900명에 달하였으며, 본부는 집안현(輯安縣)과 통화현(通化縣) 등지에 두었고, 국내진공작전과 친일파 제거 등을 주로 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던 전명근은 1922년 10월 하순 제7중대장 서리 김우권(金宇權)의 부하로서 동지 12명과 함께 유하현(柳河縣) 방면으로 향하다가 야저구(野猪溝) 김교성(金敎成) 집에서 일본인 하본(河本)이 지도하는 중국산림대의 포위 습격을 당하여 분전하다가 부사(副士) 김하성(金河成), 참사(參士) 왕유박(王瑜璞), 대원 한정도(韓正道)·김관학(金寬學)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이 때 지도자였던 김우권은 중상을 입고 자살하였으며, 동지 이상룡(李相龍)·김정산(金正山)·김순순(金順淳) 등은 중상을 입었고, 나머지 동지 4명은 전사한 동지들을 업고 포위선을 탈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93·44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9면
- 독립신문(1922.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