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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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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寬學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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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1922. 10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통의부(統義府) 의용군(義勇軍) 출신의 제 7중대장(中隊長) 서리(署理) 김우권(金宇權)의 인솔하에 유하현(柳河縣)으로 이동중 일본의 지시를 받은 중국(中國) 산림대(山林隊)의 습격을 받고 분전하다가 전사(戰死)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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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동하였다. 김관학이 활동한 이 단체는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군사정부인 군정부(軍政府)가 동년 11월 17일 임시정부에 소속하는 단체로 개편되면서 그 이름을 개칭한 것이다. 서로군정서는 독판제(督辦制)에 의해 운영되었다. 즉 최고지휘부인 독판부 아래에 무장활동을 담당하는 사령부·참모부·참모처 등을 두었으며, 이를 보조해 주는 기관으로 정무청·내무사·법무사·재무사·학무사·군무사 등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들 각 부서는 독판(督辦) 이상룡, 정무총장 이 탁, 내무사장 곽 문(郭文), 재무사장 남정섭(南廷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이청천(李靑天) 등이 담당하였다. 김관학이 참여한 서로군정서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은 40대의 장년층이 그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신민회(新民會)의 독립전쟁론에 의거하여 만주지역으로 정치적인 망명을 한 인물들이었다. 서로군정서에서는 조직 이후 출신인사들이 많은 평안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으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치하고, 유하현 고산자 하동(河東)지역에 40여 간의 광대한 병사와 수만 평의 연병장을 부설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 김관학은 의용군(義勇軍)에 소속되어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용군은 1914년 통화현에서 무장부대인 백서농장(白西農莊)을 운영하던 채 찬(蔡燦)·신용관(辛容寬)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 후 채 찬·장기초(張基礎) 등에 의하여 세력이 확충되어 병력이 900명에 달하였으며, 본부는 집안현(輯安縣)과 통화현(通化縣) 등지에 두었고, 국내진공작전과 친일파 제거 등을 주로 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던 김관학은 1922년 10월 하순 제7중대장 서리 김우권(金宇權)의 부하로서 동지 12명과 함께 유하현(柳河縣) 방면으로 향하다가 야저구(野猪溝) 김교성(金敎成) 집에서 일본인 하본(河本)이 지도하는 중국산림대의 포위 습격을 당하여 분전하다가 부사(副士) 김하성(金河成), 참사(參士) 왕유박(王瑜璞), 대원 한정도(韓正道)·전명근(田明根) 등과 함께 순국하였다. 이 때 지도자였던 김우권은 중상을 입고 자살하였으며, 동지 이상룡(李相龍)·김정산(金正山)·김순순(金順淳) 등은 중상을 입었고, 나머지 동지 4명은 전사한 동지들을 업고 포위선을 탈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9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5·107면
  • 독립신문(1922. 11. 30)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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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관학 - - -
본문
출생지 및 출생 연도 모두 미상이다. 1922년 8월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서간도 통일 독립군단으로 결성된 대한통의부(통의부)에 참가하여 통의부 의용군 제7중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1920년 10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여 남북만주에 일본군을 대거 투입하여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을 단행하면서 서북간도의 많은 독립군 단체가 근거지를 잃고 흩어졌고 수많은 한인이 학살당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겪었다. 이후 서간도 각지에 새로이 근거지를 구축한 독립군 단체들은 더 이상 소규모의 단일 부대로는 효율적인 항일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독립군 단체의 통합을 모색하였다. 1922년 봄 남만 지역의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광한단 등의 대표들이 모여 남만통일회의를 결성하고 통합조직체로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 얼마 뒤인 그해 8월 22일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한교회·광복군총영·평안북도독판부 등 8개 단체의 대표가 모여 대한통군부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한통의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각 독립군 단체의 대원들을 통합하여 통의부 의용군으로 재편하였다. 초기 의용군은 김창환(金昌煥)을 사령관으로 하고 1개 대대 아래 5개 중대와 독립 중대인 유격대 및 헌병대의 7개 중대로 편제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통의부가 조직되고 군사 조직으로 의용군이 편성되면서 통의부에 참여하여 의용군 제7중대원이 되었다. 의용군은 남만 각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1922년 8월에서 11월 사이 주로 류허현 대항구(大荒溝)·소황구(小荒溝)·삼도구(三道溝)·야저구(野猪溝)·입자구(砬子溝)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과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해 10월 하순 의용군 제7중대장 김우권(金宇權)의 지휘를 받아 중대원 11명과 함께 류허현 방면으로 행군하였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대원 모두가 야저구의 김교성(金敎成) 집에 투숙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8시경 고모토(河本)라는 일본 밀정이 지도하는 중국 산림대 400여 명이 의용군이 묶고 있던 김교성 집을 포위하고 기습 공격하였다. 집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의용군으로부터 일본군이 습격한다는 급보를 받은 나머지 대원들은 급히 집에서 나와 산으로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중으로 포위되어 의용군은 불리한 위치에서 중국 산림대와 총격전을 벌였다. 총탄이 빗발치는 속에서 중대장 김우권이 앞장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상을 입었고 자신을 구하려는 부하들에게 ‘나를 구하려다 모두 몰살할 것이니 너희는 군인 정신을 발휘하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중국 삼림대에게 포위당한 가운데 용감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의용군 7중대 부사(副士) 김하성(金河成), 참사(參士) 왕유박(王瑜璞), 대원 한정도(韓正道)·전명근(田明根)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사이 나머지 대원 4명은 중상을 입은 이상룡(李相龍)·김정산(金正山)·신정순(申禎淳)을 부축하여 오후 10시경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 1922년 11월 30일 자 『독립신문』에서 “지난달 하순에 중국 산림대와 교전 중 전사하였다”라는 보도로 미루어 1922년 10월 하순경에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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