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21년 문서위조행사 등을 이유로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형무소에서 만난 서달선(徐達善)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힘쓸 것을 결의했다. 출옥 후 1923년 음력 1월 중국 봉천성(奉天省) 흥경현(興京縣)으로 건너갔고, 대한통의부 부원인 이태흥(李泰興)을 만나 통의부에 가입하였다. 대한통의부가 정의부로 통합된 이후, 정의부원으로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1925년 음력 11월 초순 무렵 정의부원 김정관(金正觀)·이춘산(李春山)·이희수(李喜壽) 등과 함께 200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6년 4월 정의부 해원지방 총관소의 검무관으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이주한 한인들의 정착에 힘썼다. 같은 해 음력 7월 중순 개원현(開原縣) 전양목림자(前楊木林子) 강사진(姜似振)의 집에서 이능호(李能浩) 등과 함께 일제 밀정이었던 김재근(金在根)을 처단하였다. 자신의 명의로 군자금 모집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 경고장을 각지의 부호들에게 살포하며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1927년 2월 12일 정재호(鄭在浩)와 함께 개원성(開原城) 내 동문(東門) 밖 서학생(徐學生)의 집에서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고, 다음 날 일제 경찰에게 넘겨졌다. 1927년 11월 14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강도, 살인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한 결과, 그해 12월 13일 평양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22. 1. 16)
- 조선일보(朝鮮日報)(1927. 2. 24, 6. 19, 10. 13, 1930. 8. 9)
- 동아일보(東亞日報)(1927. 2. 27, 3. 25, 10. 12, 11. 24, 1930. 11. 20)
- 매일신보(每日申報)(1927. 10. 12, 12. 18, 12. 30, 1930. 8. 6, 11. 9)
- 중외일보(中外日報)(1927. 11. 26)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제14집 9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