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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虎
이명 金虎翼, 蕭林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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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2010 훈격 독립장
1920년 중국(中國) 무송현(撫松縣)에 근거를 둔 흥업단(興業團) 단장(團長)으로 활동하고, 1921년 4월 노령 이만에서 조직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고문(顧問)과 10월 장백(長白)에 본부를 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1월 흥업단(興業團) 단장(團長)으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연합 총회(聯合總會)를 개최하였고 1923년 무송현(撫松縣)에서 광정단(光正團) 중앙총부(中央總部) 단장(團長)으로 백산무관학교(白山武官學校)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통의부(獨立統義府) 결사천마대장(決死天摩隊長) 마진호(馬鎭浩)연계(連繫)해 조선의 대관(大官) 암살을 목적으로 부하를 밀파(密派), 1924년 중국(中國) 길림성(吉林省)에서 전만통일발기회(全滿統一發起會)광정단(光正團) 대표로 참석해 남북만주(南北滿洲) 지역에 산재(散在)한 단체를 통합한 정의부(正義府)재정분과위원(財政分科委員)으로 1926년까지 활동, 1927년 만주(滿洲) 지역 농민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결성(結成)의 발기인으로 참석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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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김호는 1920년 중국 무송현(撫松縣)에 근거를 둔 흥업단(興業團) 단장으로 활동하였고, 1921년 4월 노령(露嶺) 이만에서 조직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고문과 10월 장백(長白)에 본부를 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1월에는 흥업단 단장으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연합총회(聯合總會)를 개최하였고 1923년 무송현에서 광정단(光正團) 중앙총부(中央總部) 단장으로 백산무관학교(白山武官學校)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흥업단은 1919년 3월 무송현(撫松縣)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각 현(縣)에 지단을 설치하고 도만(渡滿)하는 조선청년들을 모집하여 백산학교(白山學校)에 보내는 한편,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단원은 약 200명 정도였다. 청산리전투 이후에는 남만주 장백현(長白縣) 일대에서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대진단(大震團),태극단(太極團),광복단(光復團),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과 더불어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김호는 통의부(統義府) 결사천마대장(決死天摩隊長) 마진호(馬鎭浩)와 연락해 조선의 대관(大官) 암살을 목적으로 5월 중순 박기량(朴期良),나상천(羅相天),신학준(辛鶴俊) 외 6, 7명의 부하를 밀파하기도 했다.

1924년 중국 길림성(吉林省)에서 전만통일발기회(全滿統一發起會)에 광정단 대표로 참석해 남북만주 지역에 산재한 단체의 통합에 노력하였으며, 정의부(正義府)의 재정분과위원(財政分科委員)으로 1926년까지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정의부 산하에서 만주지역 농민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結成)하고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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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獨立運動-民族主義運動篇(金正明, 1967) 제2권 1057면, 106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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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956) 36, 438, 511면
  • 韓國獨立史(金承學, 1970) 下卷 90, 108면
  • 東亞日報(1922. 12. 30, 192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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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韓總軍府의 改稱과 役員更迭(高警 第16800號, 1921. 5. 2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1)
  • 5月中에 있어서 間島地方 槪況에 關한 件(秘受7207號-機密 第245號, 1921. 6. 1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28)
  • 5月中 間島地方 情況 및 露領方面 不逞鮮人의 情勢(秘受7669號-高警 第19918號, 1921. 6. 2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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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外交史料館資料(朝鮮總督府 警務局, 1923.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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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間島接境地 地方 不逞鮮人의 行動에 關한 件(機密受 第289號-機密 第279號, 間島總領事, 1923. 9. 1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 滿洲의 部(34)
  • 極東鮮人 統一機關 組織에 關한 件(高警 第3172號, 1923. 9. 2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4)
  • 1923년 10월중 間島(琿春縣을 包含) 및 接境地方 治安情況(機密 第923號, 1923. 11. 1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7)
  • 최근에 있어서 間島 및 接境地方 不逞鮮人團의 狀況 等에 關한 件(機密 第16號, 間島總領事, 1924. 1. 1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7)
  • 光正團 現況(臨時報 第169號, 1924. 3. 2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8)
  • 東部 東支線方面에서 보는 露支鮮의 情況(朝特報 第9號, (朝鮮軍參謀部, 1924. 2. 9), 朝鮮軍參謀部發 朝特報에 關한 綴(2)
  • 間島 및 接境地方 不逞鮮人團의 行動에 關한 件(機密受 第175號, 1924. 6. 2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9)
  • 不逞鮮人 全滿統一에 關한 件(機密受 第175號, 1924. 8. 1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9)
  • 不逞鮮人團의 全滿統一運動에 關한 件(機密受 第214號-機密 第206號, 1924. 8. 1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9)
  • 不逞鮮人들의 全滿統一大會에 關한 件(普通 第257號, 1924. 11. 2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40)
  • 滿洲 小城子農民協會 및 同反帝同盟員 檢擧에 關한 件(京高特秘 第2929號), 警察情報 寫(副本, 1936年)(京畿道知事, 1936. 12. 19)
  • 韓國獨立運動史(국사편찬위원회) 제4권 13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315, 325, 328, 427, 444, 445면, 제6집 70면, 제7집 1315면, 1393면, 제8집 789면
  • 신한민보(1921. 6. 16, 1925. 1. 22, 1926. 3. 11)
  • 普通報 第19號:鮮人騷擾事件(關參謀 第524號, 1920. 8. 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20)
  • 國外情報-大韓總軍府의 改稱과 役員更迭(陸軍省, 1921. 5. 25)
  • 1921年 間島地方情況 槪要:露領方面 不逞鮮人 情勢(密 第33號), 國外情報:5月中 間島地方情況과 露領方面 不逞鮮人의 情勢(陸軍 省, 1921. 6)
  • 間島 및 同 接境地方에 있어서 排日團體 및 親日團體 調査의 件(機密受第110號-機密 第93號, 1922. 2. 2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2)
  • 長白縣下 不逞團의 系統的 調査(機密受 第33號-關機高收 第12699號, 關東廳警務局, 1922. 1. 1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1)
  • 安圖縣下에 있어서 不逞鮮人 會議(機密受 第962號-關機高收 第8329號-1, 1923. 6. 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6)
  • 朝鮮獨立運動-民族主義運動篇(金正明, 1967) 제3권 382, 508면
  • 1923년 9월중 間島 및 接境地方 治安狀況에 關한 件(機密受 第306號-機密 第297號, 間島總領事, 1923. 10. 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4)
  • 不逞鮮人의 行動에 關한 件(機密 第275號, 1923. 12. 1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7)
  • 全滿統一 發起文 入手에 關한 件(機密受 第78號-機密 第71號, (1924. 8. 1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9)
  • 不逞鮮人들 開催의 全滿統一會 宣言書 其他에 關한 件(機密 第10號, 1924. 12. 30),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40)
  • 極東 靑年共産黨 連絡者 名簿 送付의 件(機密公 第160號, 1925. 4. 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5)
  • 國民委員會議事錄에 關한 件(機密 第277號, 1924. 11. 1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15)
  • 極東 靑年共産黨 名簿 入手의 件(秘關機高收 第11173號-1, (1925. 4.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5)
  • 鮮匪團 正義府의 內訌에 關한 件(外務省文書課受 第60號, 1926. 2. 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42)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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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호 호 : 소림(嘯林), 이명 : 호익(虎翼) 함남 함흥 청산리대첩, 전만통일회의
본문
1881년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에서 태어났다. 호는 소림(嘯林)이고, 이명은 호익(虎翼)이다. 1907년 차도선(車道善)·홍범도(洪範圖) 등이 함경도 갑산(甲山)에서 의병부대를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부관에 임명되었다. 이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함경도를 무대로 일제를 상대로 경술국치 이전까지 국권수호활동을 벌였다.1910년 나라가 일제에게 넘어가자 서간도로 건너갔다. 1915년 봄부터는 이종호(李鍾浩)·이동휘(李東輝)·김도여(金道汝)·김하구(金河球)·김하석(金河錫)·이진룡(李鎭龍)·홍범도 등과 연락을 취하며 서북간도와 노령을 연결시킨 무장활동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1919년 만세운동 이후 국내의 많은 청장년들이 만주로 넘어오자 이들을 기반으로 지린성(吉林省) 푸쑹현(撫松縣)에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였다. 흥업단 단장을 맡아 부단장 김혁(金赫), 총무 윤세복(尹世復), 재무 이원일(李源一), 경호 오제동(吳濟東) 등과 조직을 이끌었다. 흥업단에 가입한 청년들은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족학교이자 독립군 양성소인 백산학교(白山學校)에 보내져 교육을 받고 독립군으로 양성되었다. 성립된 지 1년이 넘으면서 흥업단 병력은 약 2백 명 정도 되었다. 이들 흥업단 독립군들은 주둔지 주변의 땅을 개간해 스스로 의식을 해결하면서 유격대를 결성해 국내로 진입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기관을 파괴하는 등의 무장활동을 펼쳤다.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후 흥업단 소속 독립군도 다른 독립군과 함께 미산(密山)을 거쳐 소련의 이만까지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기존의 각 군단을 연합해 1921년 3월 대한총군부(大韓總軍府)를 결성하였다. 그 해 4월 12일에는 대소 36개 독립군단 대표들이 합의해 독립군대회를 개최하여 총군부를 대한독립단이라 개명하고 이 단체를 이끌어 갈 간부들을 선임하였다. 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 외교부장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 김좌진(金佐鎭),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참모부원 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 지청천(池靑天) 등이었다. 이때 백순(白純)과 함께 고문에 선임되었다.이후 시간이 지나자 구성원들 간에 이견이 생겨났다.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며 자유시(自由市)까지 이동하자는 의견과 만주로 되돌아가자는 견해로 나뉜 것이다. 이때 지린성 창바이현(長白縣)으로 돌아 와 새로 생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 총책임자인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밑에는 부회장 이은향(李殷鄕), 총무 윤병용(尹秉用), 비서 김용대(金容大), 군사부장 김찬(金燦), 경호부장 한창언(韓昌彦)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국민단은 청산리전투 후 함께 이동하지 않고 남아 있던 흥업단 지단원들이 1921년 10월 대한독립군비단과 통합하여 만든 단체였다.1922년 4월에는 태극단을 병합시킨 광복단까지 합병해 단장에 취임하고 독립군단의 이름을 광정단(光正團)으로 변경하였다. 광정단은 1922년 4월 15일 ‘정의를 표방하고 인도를 발휘하며 민족성 계발(啓發)과 적개심(敵愾心) 양성’, ‘철혈정신으로 국가 독립의 완전한 성취를 위해 분투 노력’을 주 내용으로 하는 단칙을 발표하였다. 항일무장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단체임을 밝힌 것이다. 창바이현 17도구(道溝) 동평덕리(東坪德里)에 본부를 두고 단장을 비롯한 부단장, 총무, 비서 등으로 구성된 총부를 구성하였다. 광정단 소속 독립군은 1922~1923년 활발한 국내진입전을 전개하였다.한편, 1923년 1월부터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편을 비롯한 독립운동계가 직면한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약 5개월간 개최된 이 회의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현 임시정부를 어느 정도 수정해 계속 이어가자는 개조파와 새로운 지도기관을 수립하자는 창조파 간의 의견차만 돌출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회의에서 창조파는 새 정부조직인 국민위원회 구성원을 발표하였는데, 국민위원 명단에 이름이 들어 있다. 직접 국민위원 임명을 찬성했는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는지 등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어 창조파가 독립운동계의 지도급 인사로 생각해 명단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1923년 초, 백순(白純)·윤각(尹覺)·박관해(朴觀海)·김태섭(金太燮)·남진호(南鎭浩)·이장녕·지장호(池章浩)·나중소 등과 만나 재중 한인사회를 이끌어 갈 자치기관 설립을 협의하였다. 남북만주 여러 지역과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이들 지도급 인사들은 펑톈[(奉天), 현 선양(瀋陽)] 서문(西門) 밖 무림빈관(茂林賓舘)에 모여 자치기관 설립을 위한 주비회(籌備會)를 결성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1924년 3월 하순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을 통합시키기 위한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가 조직되었다. 주비회는 이장녕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약 4개월간 준비 기간을 거쳐 그 해 7월 10일 지린(吉林)에서 주비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서로군정서·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대한독립군·대한독립군단·통의부(統義府)·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의성단(義成團) 대표들이 모인 이 발기회에 윤병용과 함께 광정단 대표로 참가하였다. 참가 대표들은 민족자결의 근본원칙 하에 만주 독립운동계만이라도 통일하자는 발기문을 채택하였다.이후 약 3개월간 소속 단체와 타 단체 대표들을 만나 설득해 1924년 10월 18일 본회의를 개최하였다. 본회의에는 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와 고본계(固本稧)·학우회(學友會) 등 3단체가 더 참가하였다. 본 회의는 통의부 대표로 참가한 김동삼(金東三)이 의장이 되어 이끌어 갔다. 회의 중 대한독립군·대한독립군단·학우회 등은 이념의 문제로 탈퇴하고 나머지 8개 단체가 하얼빈·액목(額穆)·북간도(北間島)의 선을 그어 그 이남 만주를 관할할 통합단체를 만든다는데 합의하고 분과위원을 선임하였다. 자치·군사·생계·교육 등의 분과가 만들어 졌고, 윤병용·승진(承震)과 함께 재정분과를 담당하였다.본 회의 후 소속 단체로 돌아 간 대표들은 내부의 모든 문제를 정리한 뒤 1924년 11월 24일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이 같이 성립된 정의부는 발기회 본회의에서 논의된 바대로 하얼빈에서 액목을 거쳐 북간도까지 선을 그어 그 이남의 남만주를 관할지역으로 하였다. 즉 입법·사법·행정의 체계를 갖추어 관할지역내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산업을 육성시켜 생존을 영위케 하는 한편 의용군을 편성해 항일무장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 이 단체의 노선이었다. 따라서 정의부는 독립군정부(獨立軍政府)의 성격을 띤 단체였다.성립초기 정의부 중앙조직은 중앙행정위원장 이탁(李沰), 간정원(幹政院) 비서장 김원식(金元植), 중앙심판원장 김응섭(金應燮), 민사위원장 현정경(玄正卿), 군사위원장 지청천, 법무위원장 이진산(李震山), 학무위원장 김용대(金容大), 재무위원장 김이대(金履大), 교통위원장 윤병용, 생계위원장 오동진(吳東振), 외무위원장 김동삼, 의용군사령관 지청천 등이었고, 입법기구인 중앙의회가 따로 구성되었다. 간정원과 사법기관인 중앙심판원을 뺀 중앙행정위원장과 위원장들은 행정업무를 협의하는 기구인 중앙행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관할지역 내 각 한인사회에는 가구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체계적으로 총관구(總管區)·지방(地方)·백가장(百家長)·구(區)·십가장(十家長) 등의 조직을 설치해 관할지역내 한인들을 관리하고 지원하였다.정의부를 성립시키기 위한 모든 회의에 참여했지만 초기 중앙조직에서는 빠졌다.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지만 교통위원장에 선임된 윤병용과 학무위원장 김용대 등이 광정단의 인물들이라 통합된 다른 단체 지도급들과 안배하는 차원에서 빠진 듯싶다. 그러나 성립되고 약 1년이 넘은 1926년 1월 11일 발표된 포고 제13호에는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포고문은 중앙행정위원회가 중앙의회를 해산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1925년 후반 오영선(吳永善)과 이유필(李裕弼)이 정의부로 와 만주 독립운동계가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해 줄 것을 권유하였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들은 이들과 협의 후 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部) 등과 협의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을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으로 추천해 상하이로 가게 하였다. 행정위원들은 이를 중앙의회에 알리고 의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의회는 정의부의 이념과 노선에 위배된다고 반발해 중앙행정위원회 불신임을 의결하였고, 행정위원회 또한 중앙의회 해산을 결정해 포고문을 발표한 것이었다.1927년 4월 1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결성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농민호조사는 재만 한인의 산업 부흥과 위생·보건·교육 등 총체적인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기구였다. 35명의 발기인 대부분은 정의부 소속의 인사들이었지만 농민호조사 결성을 주도한 인물은 안창호(安昌浩)였다. 1927년 초 지린을 방문한 안창호는 재만 한인의 생계 안정을 위해 대단위 농장 설립 계획을 정의부측 인사들과 협의하였다. 그 결과 한인들에게 거둔 출자금으로 대규모 토지를 구입해 농사를 지어 소득을 분배하고, 이익금으로 더 많은 토지를 계속 구입해 간다는 방식에 합의하였다. 그 사업을 준비하고 경영하기 위한 기구가 농민호조사였다. 그러나 이 농민호조사의 사업은 1927년 4월 같은 시기에 진행된 만주지역 민족유일당운동과 겹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진행되던 기간 중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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