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정인호(鄭寅琥) 등이 경기도에서 조직한 구국단(救國團)에 관여하여 활동하였으며,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는 서간도에서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김장식이 가담한 서로군정서는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군사정부인 군정부가 동년 11월 17일 임시정부에 소속하는 단체로 개편되면서 그 이름을 개칭한 것이다.
서로군정서는 독판제(督辦制)에 의해 운영되었다. 즉 최고지휘부인 독판부 아래에 무장활동을 담당하는 사령부·참모부·참모처 등을 두었으며, 이를 보조해 주는 기관으로 정무청·내무사·법무사·재무사·학무사·군무사 등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들 각 부서는 독판(督辦) 이상룡, 정무총장 이 탁, 내무사장 곽 문(郭文), 재무사장 남정섭(南廷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이청천(李靑天) 등이 담당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은 40대의 장년층이 그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신민회(新民會)의 독립전쟁론에 의거하여 만주지역으로 정치적인 망명을 한 인물들이었다.
김장식이 참여한 서로군정서에서는 조직 이후 출신인사들이 많은 평안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으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치하고, 유하현 고산자 하동(河東)지역에 40여 간의 광대한 병사와 수만 평의 연병장을 부설하였다.
한편 의용군을 통한 친일파 제거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의용군은 1914년 통화현에서 무장부대인 백서농장(白西農莊)을 운영하던 채 찬(蔡燦)·신용관(辛容寬)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 후 채 찬·장기초(張基礎) 등에 의하여 세력이 확충되어 병력이 900명에 달하였으며, 본부는 집안현(輯安縣)과 통화현(通化縣) 등지에 두었다.
서로군정서가 1922년 8월에 조직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참여하자 김장식도 김동삼 등과 함께 대한통의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대한통의부는 1923년 8월 23일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와 그에 참여하지 못한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이루어진 1920년대 전반기 남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요 간부로는 총장 김동삼, 부총장 채상덕(蔡相悳), 비서과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 검무부장 최명수(崔明洙),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사판소장 이영식(李永植),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식산국장 박득산(朴得山), 권업부장 강제하(康濟河),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교통국장 황동호(黃東浩),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을 들 수 있다.
그 후 김장식은 1920년대 중반에는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하였고, 1932년 4월 중에는 향방(香方) 농무계에 참여하여 아성현(阿城縣) 제3구 태평교(太平橋) 부근을 답사 중 비적이 쏜 탄알에 부상을 입기도 하였으며, 동년 말에는 하얼빈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563면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116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8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