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4월중순 (月中旬) 일국 (日國) 대판 (大阪) 에서 일본대학 (日本大學) 전문부 (專門部) 특과 야간생 (特科夜間生) 으로 재학 (在學) 하면서 금성 (金城) 열쇠제작소 (製作所) 에 취업중 (就業中) 김봉각 (金奉珏) 으로부터「조선청년 (朝鮮靑年) 의 갈 길은 다만 하나뿐이다. 민족 (民族) 의 해방 (解放) 을 위하여 헌신 (獻身) 할 길뿐이다」라는 주장 (主張) 에 공명 (共鳴) 하고 흥아연구회원 (興亞硏究會員) 이 되어 동지적 (同志的) 맹약 (盟約) 을 다짐하다가 조선독립운동 (朝鮮獨立運動) 의 중핵적 (中核的) 모체 (母體) 를 결성 (結成) 하고자 계림동지회 (鷄林同志會) 를 비밀 결사 (秘密結社) 하여 활동 (活動) 하다가 피체 (被逮) 되어 징역 1년6월 3년간 (年間) 집행유예 (執行猶豫) 를 받았으나 1년 8월 23일간의 옥고 (獄苦) 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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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제주(濟州) 사람이다. 1940년 3월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專門部) 특과(特科) 야간부에 재학하던 중, 낮에는 김봉각(金奉珏)의 매형이 경영하는 금성제작소(金城製作所)에서 김병목(金丙穆)과 함께 근무하면서 "조선청년의 갈 길은 오직 하나, 민족해방을 위하여 헌신하는 길뿐이다"는 김봉각의 주장에 공감하고 함께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담론한 끝에, 강금종(姜金鍾)·한만숙(韓萬淑) 등의 동지를 규합, 같은 해 5월 흥아연구회(興亞硏究會)를 조직,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어 일본 국내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직을 더욱 확대 강화하기 위해 흥아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한인비밀결사인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를 결성, 행동방침을 정하고 항일민족운동을 강화하던 중 1941년 2월 25일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1942년 11월 18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754∼75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762∼76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별집 제3집 321·322·325·704면
- 소화특고탄압사(명석박륭) 제7권 139∼14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1078·1079·1305∼13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