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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647
성명
한자 高奉朝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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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년도 1992 훈격 애족장
1940.4월중순(月中旬) 일국(日國) 대판(大阪)에서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專門部) 특과 야간생(特科夜間生)으로 재학(在學)하면서 금성(金城)열쇠제작소(製作所)취업중(就業中) 김봉각(金奉珏)으로부터「조선청년(朝鮮靑年)의 갈 길은 다만 하나뿐이다. 민족(民族)해방(解放)을 위하여 헌신(獻身)할 길뿐이다」라는 주장(主張)공명(共鳴)하고 흥아연구회원(興亞硏究會員)이 되어 동지적(同志的) 맹약(盟約)을 다짐하다가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중핵적(中核的) 모체(母體)결성(結成)하고자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비밀 결사(秘密結社)하여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6월 3년간(年間) 집행유예(執行猶豫)를 받았으나 1년 8월 23일간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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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제주(濟州) 사람이다. 1940년 3월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專門部) 특과(特科) 야간부에 재학하던 중, 낮에는 김봉각(金奉珏)의 매형이 경영하는 금성제작소(金城製作所)에서 김병목(金丙穆)과 함께 근무하면서 "조선청년의 갈 길은 오직 하나, 민족해방을 위하여 헌신하는 길뿐이다"는 김봉각의 주장에 공감하고 함께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담론한 끝에, 강금종(姜金鍾)·한만숙(韓萬淑) 등의 동지를 규합, 같은 해 5월 흥아연구회(興亞硏究會)를 조직,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어 일본 국내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직을 더욱 확대 강화하기 위해 흥아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한인비밀결사인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를 결성, 행동방침을 정하고 항일민족운동을 강화하던 중 1941년 2월 25일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1942년 11월 18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754∼75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762∼76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별집 제3집 321·322·325·704면
  • 소화특고탄압사(명석박륭) 제7권 139∼14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1078·1079·1305∼131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고봉조 고산삼조(高山森造) 전라남도 제주(濟州) 계림동지회 비밀결사 사건
본문
1920년 9월 11일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성산면(城山面,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城山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정길(高丁吉)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이명은 고산삼조(高山森造)이다. 1934년 성산서공립보통학교(현 동남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이 거주하는 오사카(大阪)로 도항하였다. 이듬해 3월 오사카 심상소학교 고등과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4월에는 오사카 인근 후세시(布施市) 성동(城東)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다. 20세가 되던 1940년 4월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특과(特科)에 야간생으로 입학하였다. 학교에 적을 두는 한편 오사카 소재 금성제작소(金城製作所)에 취업하였다. 이 회사는 비밀결사 활동을 같이하는 김봉각(金奉珏)의 매형이 경영하던 곳이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김봉각·김병목(金丙穆)과 생활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한국 청년이 갈 길은 다만 하나뿐이다.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헌신할 길 뿐이다”라는 김봉각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여 민족 문제를 중심으로 담론하였다. 이때 강금종(姜金鍾)·한만숙(韓萬淑) 등의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그해 5월 흥아연구회(興亞硏究會)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제의 전쟁이 미국 등 연합국과 결전으로 치달리자 일본 국내 정세는 더욱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변화를 감지하고 김봉각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중핵적 모체를 결성할 목적으로 조직을 더 확대 강화하려고 흥아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5월 26일 한인 비밀결사인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를 결성하였다. 계림동지회는 모두 20대 청년들로 구성되었으며, 제주도 출신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김봉각은 조천면 신흥리, 강금종은 삼양리, 부임전(夫林銓)과 한만숙은 조천리 출신이었다. 같은 고향 출신 사람들이 모여 서로 친화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이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주요한 직종은 회사의 직공이나 신문 배달원 등이었다. 검거되기 전까지 신문 배달을 하고 있었다. 회원들은 분야별로 업무를 분담하였으며,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일을 맡았다. 행동 방침을 정하고 항일 민족운동을 강화하던 중 1941년 2월 25일 여러 동지와 함께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듬해 1942년 11월 18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으므로 출옥하여야 하나, 일제가 출옥 후의 조직 활동을 막기 위하여 다시 1년 8개월 23일간 형무소에 가둬두었다. 1963년 10월 8일 사망하기 전까지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東成區) 오이마자토(大今里) 혼마치(本町)에서 살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2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3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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