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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389
성명
한자 金泰淵
이명 金丹冶, 金柱, 金秋星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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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5 훈격 독립장
1919년 3월 24일 경북(慶北) 김천군(金泉郡) 개녕면(開寧面) 동부면(東部面)에서 만세 시위(萬歲示威)를 주도하여 (笞) 90(度)를 받았고, 동년(同年) 8월 국권회복 운동(國權回復運動)을 위한 군자금(軍資金)의용병(義勇兵) 모집에 관계하였으며, 12월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망명, 1922년 1월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에 참가한 후 동년(同年) 4월 국내에 사회주의(社會主義) 선전(宣傳)공산당(共産黨) 건설(建設)을 위해 잠입 중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獄苦)를 치렀고, 1926년 6월 순종(純宗) 국장(國葬) (時) 상해(上海)에서 만세 운동(萬歲運動) 조직을 위한 항일 문건(抗日文件)국내(國內) 발송(發送)을 담당했으며, 1924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집행위원(執行委員),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책임비서(責任秘書), 국제공산당(國際共産黨) 원동위원(遠東委員) 등으로 활약하면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창당(創黨)재건(再建)을 주도하며 국내(國內) 사회주의(社會主義) 운동(運動)확산(擴散)을 통한 조선 독립(朝鮮獨立)을 위해 소련(蘇聯), 중국(中國)국내(國內)를 오가며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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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김단야(金丹冶)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908년부터 김천(金䤼)의 개진학교(開進學校)·진명학교(進明學校)·영진학교(永進學校)를 거쳐 1915년 기독교계 학교인 대구(大邱)의 계성학교(啓星學校)에 진학했으나 1916년 11월 일제의 조선지배를 정당시하는 미국인 교장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주동하다가 퇴학당하였다. 1917년 일본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6개월간 배운 뒤 돌아와 배재학교(培材學校)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한편 지하유인물 ‘반도의 목탁’을 발행하여 배포하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뒤, 고향인 김천 개녕면(開寧面)에서 은창서(殷昌瑞)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3․1운동 후인 1919년 8월 경남 거창군(居昌郡) 거창면(居昌面) 오형선(吳亨善)의 집에서 오형선․이덕생(李德生)·고운서(高雲瑞)·주남고(朱南皐) 등과 함께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을 조직하고 군자금모집 및 의용병 모집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들은 만주(滿洲)에서 활동하는 군정서(軍政署)에 독립군을 파견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김태연은 신도출(愼道出)이 제공한 군자금을 가지고 주남수(朱南守)·이사술(李四述)·이성년(李聖年)·백기주(白基周) 등 4명의 의용병을 선발하여 만주 군정서로 파견하였다.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동년 12월 다시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20년 2월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의 배정학교(培正學校)에 입학하여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는 한편 상해의 사회주의연구소에 출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해갔다.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상해지부가 조직될 때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을 맡고, 동년 말 고려공산당원이 되었다. 1922년 1월에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에 한국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동년 4월 김만겸(金萬謙)·여운형(呂運亨)·안병찬(安秉璨) 등이 조직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했으며, 박헌영(朴憲永)·임원근(林元根) 등과 함께 사회주의운동의 국내 활동을 목적으로 귀국했다. 이들은 태고양행(太古洋行)의 기선 북해환(北海丸)을 타고 안동에 도착하여 국내 잠입 기회를 엿보던 중 4월 3일 김태연이 먼저 신의주(新義州)에 잠입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4년 1월 19일 출옥한 그는 동아일보사·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박헌영·임원근 등과 함께 사회주의 단체인 세칭 화요파(火曜波)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1924년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과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1925년 4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결성될 때 핵심인물로 참가했다. 이때 그는 고려공산청년회의 강령 규약을 작성했고, 전형위원 및 집행위원, 연락부 책임을 맡으며 주로 코민테른, 해외 조직과의 연락을 담당하는 대외 창구의 역할을 맡았다.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 조직이 발각되자, 김찬(金燦) 등과 함께 상해로 망명해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를 설치하고 국제공산당과 국내 공산당을 연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코민테른의 동양혁명후원회의 후원자금, 유학생의 갹출금 등 다양한 경로로 모집된 자금을 국내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전달하면서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활성화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조선공산당 기관지『불꽃〔火焰〕』의 주필을 맡기도 했다.

1926년 봄 국내에서 대규모의 대중시위를 계획하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동년 4월 26일 융희황제(순종)의 승하 소식을 접하면서, 3·1운동 때와 같은 전국적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것이 6·10만세운동의 태동이었다. 이때 김태연은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운동의 선봉에 서야 된다’는 취지하에 6·10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와 김찬은 국내에서 6·10만세운동을 책임질 인물로 권오설(權五卨)을 선정하고 5월 초부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때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격문과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김태연은 직접 만주 안동현(安東縣, 현재 丹東市)과 신의주(新義州)로 가서 권오설을 만나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또한 그는 김찬과 함께 만세시위 때 사용할 장문의 격문인「곡복(哭服)하는 민중에게 격한다」를 지어 상해 삼일인쇄소에서 5천부 정도를 인쇄한 뒤 국내에 발송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국제공산당(國際共産黨) 원동위원(遠東委員) 등으로 활약하면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창당과 재건을 주도하며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확산을 통한 독립을 위해 소련·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上海地方(5)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1457~1458면
  • 김단야 파일(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제3권 459~460면, 제4권 374면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6) 제1권 分冊 509면
  • 韓國民族運動史料(國會圖書館, 1976) 中國篇 601·8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0권 1012면
  • 不穩新聞 「火焰」에 관한 건(朝保秘 제770호, 1926. 7. 3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6)
  • 朝鮮共産黨 사건 검지에 관한 건(朝保秘 제11019호, 1926. 9. 1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7)
  • 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朝鮮總督府 警務局, 1930) 94면
  • 金炯善 등의 治安維持法 違反事件 檢擧에 關한 件(京高秘 제3975-1호, 1933. 8.5), 雙에 관한 情報綴(6)
  •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206~207·212~217면
  • 國外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 警務局, 1934) 54면
  • 在上海 鮮支人 共産黨員 會合에 관한 件(高警 제261호, 1925. 1. 2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上海地方(5)
  • 時代日報(1926. 6. 29·7. 2)
  • 朝鮮中央日報(1934. 3. 11·3. 30․4. 5·4.18·12. 11·12. 2·12. 28)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金泉支廳, 1919. 4. 15)
  • 赤化鮮人 金泰淵 외 2명 逮捕 取調 槪要(高警 제1666호, 1922. 6. 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善人과 過激派(3)
  • 東亞日報(1922. 6. 18·9.22, 1924. 1. 22, 1931. 2. 1, 1933. 11. 25, 1934. 1. 27·4. 2·4. 17)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태연 김단야(金丹冶), 김규(金圭), 김추성(金秋星), 김주(金柱) 경상북도 김천(金泉) 3.1운동, 김천군 개령면 만세시위, 6.10만세운동
본문
1900년 1월 16일 경상북도 김천군(金泉郡) 개령면(開寧面) 동부동(東部洞)의 중농(中農)이었던 김종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99년 1월 16일, 1901년 1월 16일에 태어난 것으로 확인된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이명으로 김단야(金丹冶)·김규(金圭)·김추성(金秋星)·김주(金柱)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김단야로 잘 알려져 있다.1906년 서당에서 2년간 한문을 수학하였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개진학교(開進學校), 진명학교(進明學校), 계성학교(啓聖學校) 등에서 교육을 받던 중,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인 학교 교장에 반대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하였다.1917년 1월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원에 입학했지만, 학자금 부족으로 그 해 9월 국내로 돌아와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현 배재고등학교)에 다녔다.1919년 『반도의 목탁』이라는 비합법간행물을 발행하는 학생 비밀결사에 가담하고,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신문 등을 통해 국내 각지의 만세 소식을 접하고 고향인 경북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으로 내려와서 1919년 3월 24일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치안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재판을 받고,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출옥 후 서울로 올라와 비밀결사 ‘개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개척단은 만주의 독립군 사관학교에 보낼 학생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하였다. 개척단의 존재가 일제 경찰에 탐지되자, 1919년 12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0년 쑨원(孫文)의 광둥정부가 설립한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광둥(廣東)으로 향하였지만, 입학에 실패한 후 상하이로 돌아왔다.1921년 3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기관지 『벌거숭이』 편집인을 맡았다. 그 해 9월 상하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되었고, 10월에는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1년 11월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선임되어 이듬해에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민족대회와 극동청년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이르쿠츠크로 떠났다.1922년 1월 소비에트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와 원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해 3월에 상하이로 돌아온 후, 국제공산청년회의 지도를 받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2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상하이에서 국내로 이전하기 위하여 입국하던 중 신의주(新義州)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산주의 선전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 1월에 풀려났다.출옥 후, 1924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이 되어 선전부를 맡았다. 도쿄에서 발행되던 『신흥청년』 편집자가 되었고,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1925년 1월 상하이로 다시 파견된 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4월 비밀리에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연락부 책임자로 코민테른, 국제공산청년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25년 12월 신의주에서 발생한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1926년 1월부터 7월까지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의 주필이 되었다. 1926년 4월 순종(純宗) 사망 당시 국내에 비밀리에 잠입하여 만세운동 준비에 착수하였다. 상하이에서 「상(喪)에 복(服)하고 곡(哭)하는 민중에게 격(檄)함」이라는 격문을 만들어 국내로 보냈으나 이것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이른바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으로 이어졌다.1926년 8월 코민테른 동방부의 승인을 받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였다.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 중에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 제2차대회 대표자로 파견된 김철수(金錣洙)의 통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1928년에 열린 코민테른 제6차대회와 조선문제위원회에 참석하였다. 그 해 11월 조선문제위원회에 조선공산당 문제를 검토할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이 문서는 「12월테제」 작성을 위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 「12월테제」는 1928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채택한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이다.1929년에 국내에 들어와 9월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그 해 11월에 발생한 검거 사건을 피해 다시 해외로 떠났다.1930년 2월 모스크바로 건너간 후, 그 해 4월에 코민테른의 임무를 받고 다시 상하이로 파견되어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지도하였다. 이때 잡지 『콤무니스트』 발간을 주도하였다.1934년 1월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그 해 2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부장으로 선임되어 1936년 8월까지 재임하였다. 재임 기간 중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 『어떻게 콜호즈원은 유족하게 되는가』 등의 한글 팜플렛을 간행하였다.1938년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기록에 따르면 1937년 11월 5일 반혁명테러단체 조직과 밀정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후, 1938년 2월 1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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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태 90 대구지방법원김천지청 1919-04-15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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