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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317
성명
한자 李瑋鍾
이명 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7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화란 “해그” 밀사(密使)로 갔으나 참석(參席)치못하고 미국협회(美國協會)(신문기자협회(新聞記者協會))밖에서 일본(日本)강압(强壓) 박해(迫害)함을 통론(痛論)하여 청중(聽衆)으로 하여금 비분(悲憤)(禁)치 못하게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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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주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李範晋)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각국을 순회했으며,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가 유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하여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에 있는 한국공사관이 폐쇄되고 주재 공사에게는 철수령이 내렸으나, 주 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은 2등참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 이위종과 함께 철수하지 않고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체류하였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 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있자, 서울에서는 이 회의에 한국대표를 참석시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기 위하여 정사(正使)에 이상설(李相卨), 부사(副使)에 이 준(李儁)과 이위종 등 세 밀사를 임명하였다. 이준은 황제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가지고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이미 1년 전에 망명해 와 있는 이상설과 만나 합류하고 함께 페테르부르그에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밀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1907년 6월 25일 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한국 대표로서 공식으로 회의장에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활동에는 프랑스어와 영어에 유창한 이위종이 교섭과 문서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열강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반면에 신문기자들과 네덜란드의 현지 여론은 한국대표들의 활동에 호의적인 인사들도 있었다. 이에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무효임을 알리는 공고사(控告詞)를 이상설 이 준 이위종 등 세 특사의 연서로 작성하여 6월 27일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해서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프랑스어로 된 이 장문의 공고사와 그 부속문서의 프랑스어 본은 이위종이 작성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위종은 7월 9일에 열린 각국신문 기자단의 국제협회(國際協會)에서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강연을 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은 일본이 무력으로 위협하여 강제 체결된 것으로 무효이며, 한국의 국민과 황제는 한국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열망하고 있으므로 세계가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회합에는 각국대표와 이름 있는 언론인 및 각국 수행원들까지 광범위하게 참석했는데, 이위종의 연설은 모든 참석자들로 하여금 감명과 찬사를 금치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서 의결하게 까지 하였다. 이위종의 이 강연의 성과는 당시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신문인 『헤이그신보(haagsche courant)』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제여론의 환기에 상당히 큰 작용을 하였다. 밀사들은 투숙한 호텔정문에 태극기를 걸고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 밀사 중의 이 준이 7월 14일 순국하였다. 이위종은 이상설을 따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을 순방하고 러시아로 돌아가서 군정부(軍政府)와 권업회(勸業會)에 참가하는 등 구국운동에 생애를 바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연감 4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36 23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289 48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8 19 449 45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16면
  • 매천야록 420면
  • 기려수필 116 118 11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2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7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70 171 173 174 175 176 17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483 484 679 82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위종 이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Ли 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서울 -
본문
1884년 1월 9일 서울에서 아버지 범진(範晉)과 어머니 풍양 조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명은 이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Ли 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이다. 조부 경하(景夏)는 철종~고종 대에 걸쳐 포도대장, 어영대장, 금위대장,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무관이었고, 아버지 범진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측근으로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 이범진은 아관파천 후 법부대신 겸 경무사로 정국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이 환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밀려나 주차미국특명전권공사(駐箚美國特命全權公使)로 임명되었다. 1896년 7월 16일 아버지를 따라 미국 워싱턴으로 떠났다. 11월 2일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근대적 교육을 받았다. 1899년 3월 20일 주찰아법오삼국특명전권공사(駐紮俄法墺三國特命全權公使)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파리로 옮겨와서 1900년 5월 귀족학교인 리쎄(Lycée) 법학부에 입학하여 2년간 국제법을 전공하고 졸업하였다. 1902년 파리로부터 27km 떨어진 생시르(Saint-Cyr)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4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파리의 151연대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그해 3월 18일 아버지가 공사로 있던 주러시아 한국공사관의 참서관으로 임명되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1905년 11월 1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교회에서 스웨덴 외교관의 혈통을 이어받은 러시아 남작의 딸 엘리자베타 발레리야노브나 놀켄(Елизабета Валерияновна Нолькен)과 결혼식을 올렸다. 귀족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러시아정교에 입교하고 이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Ли 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라는 러시아 이름을 받았다. 러일전쟁 기간에는 아버지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를 위해 활동하였다. 러시아 정부에 광무황제와 대한제국 정부가 러시아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강요에 밀린 광무황제는 1904년 5월 18일 “러시아 수도에 있는 공사관을 철폐하고 이범진 공사를 소환하라”고 지시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9월 1일 이범진을 면직시켰다. 그러나 이범진 부자는 주러시아 공사관이 철폐되는 1906년 1월까지 러시아정부의 지원을 받아가며 활동을 계속했다.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서울에서 광무황제의 특명을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온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과 함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되었다. 6월 25일 경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대회 참가 대표들과 외국 언론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한국 침략상을 폭로하는 등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본의 강력한 방해공작과 구미 열강들의 무관심으로 평화회의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외교권을 상실했다는 이유였다. 평화회의 회의장에 참석하지 못하자 언론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다. 7월 5일 평화회의 회의장 앞에서 영국의 신문기자 윌리엄 스테드(William Stead)와 회견을 가졌다. 회견에서 스테드에게 자신은 법과 정의와 평화의 신을 찾아 헤이그에 왔으나 평화회의 대표들은 정의와 조약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고 역설하였다. 을사늑약에 따라 대한제국 대표들의 대표권이 없다는 스테드의 주장에 대해, 을사늑약은 광무황제의 승인 없이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법적인 무효조약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대한제국이 평화회의에 참석치 못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하였다. 7월 9일 밤 기자들의 모임인 국제협회에서는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을 위해 호소함(A Plea for Korea)」이라는 주제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일본의 ‘동양평화’ 주장은 허구이고 한국 민중은 일본의 지배에 저항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역설했다. 이 연설은 회견장에 모인 세계 각국 기자들을 감동시켰는데,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의 박수로 채택했다. 이러한 사실은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헤이그 신보(Haggsche Courant)』에 게재되었다. 그렇지만 헤이그특사들의 활동으로 국제여론을 바꿀 수는 없었다. 구미 열강들의 무관심에 분노한 부사 이준은 7월 14일 분사(憤死) 순국하고 말았다. 이상설과 함께 이준의 장례식을 치른 후 7월 19일 헤이그를 출발하여 영국에서 3일간 머문 다음 8월 1일에 2주일간 체류 예정으로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한국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사실, 광무황제가 을사늑약에 동의한 적이 없다는 사실,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 한국민이 결코 독립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등을 미국정부에 일일이 설명하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에게 면회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미국 도착 다음날 『뉴욕타임즈』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에서 일본이 한국과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규탄하고, 헤이그특사 활동 이후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사실을 지적한 다음, 한국이 미국을 친구로 여기고 있다며 지원을 요청하였다. 또한 공립협회 주최 환영식상에서 도미(渡美)의 목적이 미국 대통령의 지지를 얻고, 미국사회를 상대로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데 있다고 연설하였다. 그리고 다시 헤이그로 돌아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평화회의에 끝까지 주력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9월 1일 다시 헤이그로 돌아가 현지의 청년기독교협회의 도움을 받아 임시로 매장해 두었던 이준의 유해를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9월 5일 그곳을 떠나 파리, 베를린, 런던 등지를 돌며 구국연설회를 개최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헤이그에서 이준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러시아 한인들의 애국심과 분노를 야기했다. 최재형(崔在亨)과 이범윤(李範允)은 연추(延秋)(얀치헤, 노보키예스크)에 의병본부를 설치했다. 1908년 봄에 이르러 자금과 의병 모집을 목적으로 안중근, 엄인섭(嚴仁燮), 김기룡(金起龍)을 중심으로 한 87형제가 결의한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의병본부에 합류했다. 이렇듯 고조되어 가던 연해주의 의병운동을 지도, 지원하기 위해 이범진으로부터 1만 루블을 받아 1908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연해주에 도착한 후 4월경 연추 최재형의 집에서 동의회를 조직하였다. 수백명이 참가한 총회에서 총장 최재형에 이어 부총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한 표 차이로 뒤진 이범윤이 크게 화를 내자 부총장 당선을 고사하고 이범윤에게 양보해 사태를 진정시켰다. 이후 실시된 회장 이하의 선거에서 회장에 선출되었다. 부회장에 엄인섭, 서기에 백규삼(白圭三) 그리고 발기인 전원은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가져온 1만 루블과 최재형이 출자한 1만 3,000루블, 수청(水淸)(스찬) 방면의 동포들이 낸 6,000루블에다 각지에서 기증받은 군총 약 100정이 동의회 의병을 위해 기부되었다. 동의회 의병은 1908년 7월에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도영장 전제익(全濟益)이하 좌영장 엄인섭, 우영장 안중근이 인솔하는 200~300명의 연해주의병이 두만강 대안에 대기해 있다가 7월 7일 강을 건너 경흥군 홍의동(洪儀洞)으로 진격해 들어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들은 초기 선제공격을 통해 홍의동전투와 신아산(新阿山)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회령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회령부근 영산(靈山)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패배하고 말았다. 영산전투는 국내로 진공한 이후 가장 남쪽까지 진격한 마지막 전투였다. 이후 연해주 의병은 차츰 연추 등지로 귀환했으며 국내진공작전은 일단 종료되었다. 동의회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의병이 실패로 돌아가자 7월 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했다. 1911년 1월 26일 정오 이범진이 노바야 제레브냐에서 자결했다. 장례식은 2월 6일 우스펜스키 묘지에서 한국식으로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유언에 따라 아버지가 남겨놓은 자금 1만 2,000루블을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단체 그리고 독립운동가들 및 그들의 유족들에게 전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1916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블라디미르군사학교에 입학하였다. 5월 졸업한 후 소위보가 되어 라쟌주 스코핀시 제81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917년 5월경에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대치하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가 독일과 단독 강화조약을 체결하자 동원이 해제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혁명 이후 러시아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던 내전은 1918년 5월 체코군이 봉기를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제국주의 동맹군이 내전에 간섭하게 됨으로써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때 자신이 제정러시아군에 처음 입대했던 라쟌주 스코핀에서 적군에 속한 제3국제연대에 입대하여 공병대에 배속되었다. 이어 곧 재조직된 제15소총연대로 옮겨가 기관총부대의 부대장이 되었다. 한편 1918년 10월 연대 야체이카의 후보당원이 되었다가 12월 러시아공산당의 정당원이 되었다. 1919년 4월 그가 부대장으로 있던 제15소총연대는 우파(Уфа)의 전선으로 떠났다. 부대의 정치지도원으로 우파 함락전에 참가하여 그 공헌으로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 1919년 8월 12일에 모스크바에서 한인들의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보병대기관총부대장으로 우파지역 탈환 때 큰 공로를 세웠다고 소개되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집회에서 소비에트공화국에 한인적군부대를 조직하기 위해 ‘한인중앙집행위원회(Корейский ЦИК)’를 즉시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열렬한 박수갈채 속에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으며, 결의를 실행하는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곧 외무인민위원회 동양부 산하에 조직한 제1한인공산주의자 야체이카를 러시아와 시베리아의 한인노동자, 한인대표자의 중앙집행위원회로 재조직하였다. 이후 혁명군사위원회에 의해 3군과 5군 내 한인부대 조직의 군사지도자로 선정되었다. 이 당시 활동은 일본 정보당국에도 탐지되었다. 그 첩보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모스크바에는 고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 한인 측의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일설에는 이위종이 과격파군 한인부대의 사령관으로 그 부하에 약 4,000명의 한인들을 이끌고 이르쿠츠크 이서(以西)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다른 첩보에는 “모스크바 노농정부외교부에는 극동국이라는 것이 있는데 극동국에는 중국인 및 한인 유력자를 두어 극동에 관한 과격사상 선전 기타에 관한 사무를 담임하고 있다. 한인 측에서는 전주러시아 한국공사 고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라는 한인이 군정부라는 것을 조직하여 스스로 그 수령이 되어 한인에 대한 징병제도나 그와 같은 강제적 병역모집법을 실시하여 모스크바로부터 이르쿠츠크 사이에 40세 이하의 한인 장정 약 7,800명을 이미 모집”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력 수는 과장되어 보이지만 군사지도자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1920년 초 옴스크에서 퇴각하여 이르쿠츠크에 머무르고 있던 시베리아 임시정부의 수반 콜차크가 적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해 4월 6일 완충국가로서 원동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러시아 내전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적군의 이르쿠츠크 점령으로 원동 연해주를 제외한 시베리아 일대에서 내전이 일단락되자 군대를 떠났다. 군대에서 보여준 선전선동 능력을 인정받아 당사업과 대중사업을 위해 시베리아로 파견되었다. 1920년 외무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우랄지역 한인 노동대중 사이에서의 선전선동사업을 위해 페름시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러시아공산당 세미팔라틴스크 주위원회에서 당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페름에서 세미팔라틴스크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한인 야체이카를 조직하고 한인부의 비서가 되었다. 또한 한인을 위한 당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에서는 한인들의 문맹퇴치사업을 실시하였으며, 한인들의 정치당학교가 되게하여 정치지식, 영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현지의 한인들과 중국인들 사이에 노동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주직업소비에트를 조직하였다. 또한 러시아공산당 세미팔라틴스크 주위원회의 명령으로 크라스 노야르스크 주위원회 사업을 위해 파견되어, 그곳에 한인부를 조직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12월부터는 한인부의 해산으로 주양식위원회에서 주양식감독관의 임무를 맡았고, 조세감독청 부장의 보좌역을 겸임하였다. 1922년에는 주양식위원회 공산주의 야체이카의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그해 5월 러시아 공산당의 협조 아래 야체이카 위원으로 선정되어 양식일꾼 모임을 조직하고 비서로 선출되었다. 또한 ‘주양식위원회’에서 노동자 보호에 관한 위원회 위원, 사회보험국 전권위원, 청년과 여성 사이에서의 사업에 관한 지도자로 일했다. 10월에는 주양식위원회 특별비서부 전권위원과 유치원 감독에 관한 경제위원회 상설대표로 선출되었다, 11월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시소비에트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주식회사 ‘흘레보쁘로둑트(Хлебопродукт)’로 옮겨가 조합지도원으로 일했으며 그해 12월 26일까지 주양식위원회 야체이카의 책임비서직을 겸임하였다. 1923년 1월 3일 예니세이주 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러시아 소비에트공화국 공민권을 획득하였다. 1924년 3월 30일부터 조합지도원이자 출납원으로, 4월 15일부터는 당배급부장의 지명에 의해 ‘흘레보쁘로둑트’ 야체이카 집행국의 위원으로, 직업동맹의 선출에 의해 러시아 공산당 위원으로 노동자보호위원회 의장과 ‘흘레보쁘로둑트’ 산하 모프르(МОПР)(국제혁명자구원회) 야체이카 의장이 되었다. 1924년 10월 주식회사 “흘레보쁘로둑트”의 치타지국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상업 감독관과 배급과 야체이카 책임자의 직위에 선정되고, 또한 부사장이 되었다. 1924년 10월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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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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