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남 양산(梁山) 사람이다.
1919년 양산읍 북부동(北部洞)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엄주태(嚴柱泰)와 함께 동지를 규합하면서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에 주동하였다.
그는 부산에서 일어난 청년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직접 보고 군중시위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엄주태에게서 상황을 전해 듣고 협의 끝에 먼저 동지 규합을 위해 독립선언서 5매를 복사하여 박삼도(朴三道)·정주봉(鄭周奉)에게 찾아가 거사를 의논하였다.
날짜는 1919년 3월 27일 양산 장날로 결정하였으며 독립선언서 2백매와 공약서, 경고문 등을 등사하고 '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도 만들었다. 3월 27일 이들은 준비물을 품속에 품고 장터에 잠입하여 선언서를 군중에게 배부한 후 3천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헌병에 붙잡혔다.
그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5. 28 大邱覆審法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218∼1220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211∼214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