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11월 안규홍 (安圭洪) 의병진 (義兵陣) 에 들어가 포군 (砲軍) 으로 임명 (任命) 되어 보성 (寶城) 장흥 (長興) 순천 (順天) 등지 (地) 에서 일군 (日軍) 과 교전 (交戰) 하면서 1909년 부하 (部下) 7명 (名) 을 데리고 보성군 (寶城郡) 복내 (福內) 장터에서 물품 (物品) 을 사고 있는 일군 (日軍) 2명 (名) 과 한인 통역 (韓人通譯) 1명 (名) 과 조우 (遭遇) 하여 일군 (日軍) 1명 (名) 과 통역 (通譯) 1명 (名) 을 살해 (殺害) 하고 일군 (日軍) 1명 (名) 에게 중상 (重傷) 을 입히고 피체 (被逮) 되어 1910. 5월 교수 (絞首) 를 선고 (宣告) 받아 순국 (殉國)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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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남 광주(光州) 사람이다.
1908년 11월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에 들어가 포군(砲軍)의 직책을 가지고 5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총으로 무장, 보성(寶城)·장흥(長興)·순천(順天) 등지에서 일관헌을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09년 5월 18일에는 부하 7명을 대동하고 보성군 율어면(栗於面) 유치(柳峙)에서 복내장(福內場)의 물품을 사고 있던 일군 2명과 한인통역 1명을 만나 교전을 벌인 끝에 그들 가운데 일군 1명에게는 중상을 입힌 다음 총 2정과 군도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의병초토화를 목표로 한 일제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 기간 중이던 1909년 9월 24일 일군에게 붙잡혔다.
그리하여 1910년 2월 7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뒤 항고하였으나 3월 22일 대구공소원과 5월 2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0. 3. 22 大邱控訴院)
- 判決文(1910. 5. 2 高等法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824·825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