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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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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6047
성명
한자 金尙德
이명 金相徹, 金在斗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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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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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90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0년 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 2. 8 동경(東京)에서 조선청년독립단회원(朝鮮靑年獨立團會員) 김철수(金喆壽) 윤창석(尹昌錫)등 11(名)과 같이 2. 8 독립선언(獨立宣言)을 하고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7월15일간의 금고형(禁錮刑)을 받았으며, 1920년 중국(中國)으로 망명(亡命)하여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1923년 국민대표회의 대표(國民代表會議代表), 그후 대한청년동맹회 집행위원(大韓靑年同盟會執行委員), 1928년에는 정의부(正義府)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 통합 운동(統合運動)으로 전민족(全民族) 유일당조직책진회(唯一黨組織策進會)구성(構成)하였고 1942년에는 임시의정원의원(臨時議政院議員) 임정 선전위원회(臨政宣傳委員會)등으로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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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고령(高靈) 사람이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東京)에서 조선청년독립단원(朝鮮靑年獨立團員)인 김철수(金喆壽)·윤창석(尹昌錫) 등 11명의 대표들과 함께 조선기독교청년회관(朝鮮基督敎靑年會館)에서 2·8 독립선언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있던 유지들에게 우송한 후 일경에게 붙잡혀 1919년 3월 21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금고(禁錮) 7월 15일형을 선고받았으며 2심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23년 2월 2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서 개조파(改造派)에 속하여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나 국민 대표회의 분열로 인하여 활동이 중단되자 1924년 봄 중국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磐石縣)으로 가서 김동삼(金東三)·김원식과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기관지로 《노동보(勞動報)》를 발간하였다 동년 4월 5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청년동맹회(大韓靑年同盟會) 결성에 참가하여 조직의 집행위원과 상무위원 및 정치사회연구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고 9월 27일에는 길림성 길림지방에서 조직된 조선독립운동자후원회(朝鮮獨立運動者後援會)의 창립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5월 길림성 반석현의 한족노동당에서 중국지역에 거류하는 한인들에 대한 보호를 위해 중앙집행위원과 선전부 책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8년 5월 12일 정의부(正義府)· 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3부 대표들이 이청천(李靑天)·김좌진(金佐鎭)·김동삼(金東三)과 함께 길림성 반석현의 영고탑(寧古塔)에서 회합을 가지고 통합단체로서 전민족유일당조직책진회(全民族唯一黨組織策進會)를 구성하여 각당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결렬됨으로 1928년 12월 책진회측에서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결성하였을 때 정의부를 탈퇴하고 김동삼 계열에 속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2월 10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대회의 결정에 따라 신숙(申肅)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에 파견되어 한중연합군인 ‘한중연합토일군(韓中聯合討日軍)’의 조직을 위해 중국 정부와 교섭하며 대일한중연합전선(對日韓中聯合戰線)의 결성에 힘썼다.

또한 중국 동삼성(東三省) 소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대표 홍진(洪震) 등 6명과 중국 상해에 있는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대표 신익희(申翼熙) 등 5명이 남경에서 회합하여 통합을 결정하고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할 때 신익희·윤기섭(尹琦燮)과 함께 상무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5일 5당통합(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후 한국독립당 재건파(再建派)가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여 전당대표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창당하였는데 이때 그는 이 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이정호(李貞浩)·김약산(金若山)과 ‘외교대표파견안(外交代表派遣案)’을 제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에 관한 의안을 제출하고 미국 소련 영국 등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외교적 활동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1943년 4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윤기섭·조소앙·신익희·손두환(孫斗煥)·박건웅(朴建雄)·김성숙(金星淑)·김재호(金在浩) 등 15인으로 구성된 선전위원회 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고, 1944년 3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 및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집행위원, 중앙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제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중경에서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광복후 반민특위(反民特委) 위원장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725·856·876·99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571·578·623·629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121·124·135·163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24·34·35·40·56·104·141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569·570面
  • 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警務局) 79面
  • 思想情勢視察報告集 245面
  • 思想情勢視察報告集 (其 2) 454面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6·90·102·119·125·127·136·137·151·153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303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472·517·601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276·477·829·896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3卷 467·473·609·614·620面
  •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2卷 121~136面
  • 翁金昌淑一代記(國史編纂委員會) 第2卷 134面
  • 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275·279·281·302~351·383·384·385·387·407~415·420·450·590·591·592·597·598·603·605·606·604·608·609·610·634·635·636·638·680·681·688·689·691·692·693·694·695·700·701·705·819·821·858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306·309·439·504·505·537·539·543·544·573面
  • 武裝獨立運動秘史 25·26·32·36面
  • 民族獨立鬪爭史史料(海外篇) 131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74·277·347·353·361·375·376·379·414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6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48·656·657·664·666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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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상덕 자 : 현여(玄汝), 호 : 영주(令洲), 이명 : 김상철(金相徹)·김재두(金在斗) 경상북도 고령(高靈) 2.8독립선언, 국민대표회의
본문
1892년 12월 10일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고령면(高靈面) 저전동(楮田洞, 현 고령읍 저전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김성옥(金聲玉)과 어머니 김경익(金敬益) 사이에서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현여(玄汝), 호는 영주(令洲)이다. 1930년대 중국에서 김상철(金相徹), 김재두(金在斗)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5세 때에 향리에 있는 내산서당(乃山書堂)에 들어가 한학자 이두훈(李斗勳)에게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9세까지 한학을 수학하였다. 21세가 되던 1912년 4월 고령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7월 이후에 그만두었다. 재능을 아까워 한 서당 스승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와 1915년 4월 1일 경신학교(儆新學校)에 입학해 기독교를 접하였다. 경신학교에 재학 중, 낮에는 학교 수공부(手工部)에서 목수일로 학비를 조달하였고, 밤에는 기숙사에서 공부하며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1917년 3월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합천군 출신의 강태정(姜泰禎)과 결혼하였다.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東京)의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거쳐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진학하였다. 1918년 7월 쌀 소동으로 물가가 폭등하자 생활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생활비를 벌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 개최와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민족자결주의가 유학생들의 웅변대회 주제로 자주 오르내렸다. 12월 하순 유학생 단체가 주최한 ‘망년회’ 웅변대회에서 서춘(徐椿)·이종근(李琮根)·윤창석(尹昌錫)과 함께 연사로 나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 아래 반드시 자주독립을 획득해야 한다”라고 역설하며 유학생들의 희생정신을 촉구하였다. 1919년 1월 6일 도쿄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하는 웅변대회에 참여한 후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할 때, 독립선언서 작성과 발송을 위한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자, 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최팔용(崔八鏞)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였다.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단원인 김철수(金喆壽)·윤창석 등 11명의 대표들과 2·8독립선언을 결행하고 체포되었다.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6월 대심원에서 금고(禁錮) 7개월 15일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다 1920년 2월 9일 출옥하였다. 이후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만주를 거쳐 3월 5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 사이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56명의 한국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극동민족대회 기간 중 열린 극동혁명청년대회에도 한국 대표 21명 중 한 사람으로 참석한 뒤 1922년 3월 중순 상하이로 돌아왔다. 1923년 2월 2일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경상도 대표로 참석하여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라는 창조파의 입장에 대해 “임시정부는 3·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 3분의 2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국호를 따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드는 것은 안된다”라고 성토하고 개조파 입장에 동조하였다. 이 무렵 상하이 해송양행(海松洋行)에 근무하며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12월 15일 ‘독립운동 전도(前途)에 대한 연설회’에서 “말로만 독립운동을 하지 말고, 대포보다 나은 두 주먹으로 급진적으로 나아가자”라고 강조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에는 개조파의 입장을 계승한 청년들과 함께 1924년 4월 5일에 상해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창립총회에서 발기인을 대표해 개회사를 하였다. 4월 9일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집행위원과 상무위원 및 정치사회연구부의 위원에 임명되어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도모하였다. 상해청년동맹은 의열단 계열과 갈등을 빚었다. 일제기관은 1925년 8월경 상해청년동맹이 사회주의 성향으로 기운 것으로 파악하였다. 윤자영(尹滋瑛)·조덕진(趙德津)과 함께 정치사회 연구부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6년 1월부터 『레닌』을 발간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중국민의 5·30 반제운동을 지지하는 격문 수천 부를 뿌렸다. 1925년 10월 17일 상하이의 학생 단체와 협동을 도모하려고 열린 ‘경신참변 기념식’에서 사회를 맡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6년 4월경 지린(吉林)으로 갔다. 9월 27일 조선독립운동자후원회 창립위원으로 참가했으며, 판쉬현(磐石縣)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남만지역 제1구의 조직부 책임을 맡았다. 1927년 5월 판쉬현에서 결성된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중앙집행위원과 선전부 책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족노동당이 1928년 2월 재만농민동맹으로 개편되자 중앙집행위원 겸 책임비서직을 맡았다. 1928년 5월 12일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3부 대표들이 모여 닝구타(寧古塔)에서 전민족유일당조직책진회(全民族唯一黨組織策進會)를 구성하고 그해 12월 혁신의회를 결성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한 후, 1930년 결성된 한국독립당에 참여했으며, 1931년 11월에는 재만 한국독립당이 결성한 한국독립군의 참모로 활동하였다. 이후 1932년 2월 10일 열린 한국독립당 중앙대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독립군과 중국측 반만항일의용군과의 한중연합군 창설을 협의하기 위해 신숙(申肅)과 함께 난징(南京)에 파견되었다. 중국 측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약속받는 데는 실패했으나, 12월경 중국 정부와 교섭 끝에 대일한중연합전선(對日韓中聯合戰線) 결성으로 결실을 맺자, 연합전선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한국독립군의 활동 여건이 악화되자, 1933년 말경 관내지역(關內地域)으로 이동하였다. 1935년 7월 5일 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등 5당의 통합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이후 1936년 1월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결성 직후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세력이 이탈했으나, 중앙집권적인 조직체로서 역량을 결집하는 데 노력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그해 12월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이 공격을 받자 가족을 이끌고 피란길에 올랐다. 천신만고 끝에 1940년 충칭(重慶)에 도착했으나 부인은 얼마 후 생을 마감했고, 두 살 된 막내딸도 영양실조로 죽었다. 1940년 민족혁명당의 무장단체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합류해 본부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7세 딸과 5세 아들(정육)은 민족혁명당 계열의 독립운동가족이 모여 사는 충칭의 남안구(南岸區) 대불단(大佛段)의 쑨자화위안(孫家花園)에 모여 살았다. 충칭 임시정부로 가서 시무를 볼 때는 어린 자식들을 고아원에 맡겨야 했다. 1942년 10월 제34차 임시의정원회의를 계기로 좌우가 통합된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 당원 등과 함께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정호(李貞浩)·김원봉(金元鳳)과 ‘외교대표파견안’을 제안하여 미국·소련·영국 등의 국제적 승인을 얻고자 외교 활동을 추진하였다. 1943년 4월 10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4월 2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문화부 차장으로 선임되어 6월 1일부터 근무하였다. 1944년 3월에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 1945년 3월부터는 임시정부 문화부장으로 승진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에서도 중책을 맡았다. 1944년 4월에 열린 제8회 전당대표대회에서 6인의 중앙상무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하여 중앙집행위원회의 훈련부 책임도 맡았다. 1945년 8월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 제1진으로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가족은 김구와 함께 경교장에서 머물렀다. 그해 12월 24일 한국소년군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고,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 대의원과 6월 29일에 결성된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을 역임하였다. 이와 함께 모교인 경신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교장이 되었다. 1946년 12월 22일에 결성된 민중동맹(民衆同盟)의 상무위원 겸 의사단(議事團)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5월 10일 고향인 경북 고령에서 제헌국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10월 반민법특별조사위원 9명 중 경상북도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그해 반민특위가 강제 해산되면서 사표를 제출하고 물러났다. 1950년 5월 30일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 한국전쟁 때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어 1956년에 사망하였다. 단 다른 자료에 따르면 4월 28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유해는 평양시 용성구역 용흥1동에 소재한 재북인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전고(戰鼓)』 2호(1940)에 실린 「만주운동 회고(滿洲運動回顧)」라는 글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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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안내
북한소재 국립묘지 외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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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영주 김상덕선생 순국 기념비 경상북도 고령군
2 비석 (의정부)3ㆍ1운동 기념비 경기도 의정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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