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896년 농상공부(農商工部) 주사(主事)로 관계(官界)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04년 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에 가입하여, 이후 동회의 평의원(評議員)·총무원(總務員)과 전북지부회장(全北支部會長) 등으로 활동했고 이를 바탕으로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부평군수(富平郡守)를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무렵 망국(亡國)분위기가 짙어지는 가운데 과거 자신의 반민족적 행동을 반성한 그는 1909년에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세계 정세가 변화되면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자 그는 정세파악을 위해 상해(上海)와 미주(美洲) 등지를 돌아보기로 결심하고 1918년 가을에 일단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동년 12월 제1차 목적지인 상해(上海)로 출발했다. 그런데 상해 체재 중 독립의 기회가 목전에 도래함을 감지하고 미주행(美洲行)을 단념한 채 1919년 2월 귀국했으며 곧 3·1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3월말 최익환(崔益煥)등과 함께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3·1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3·1독립운동의 경과를 통해 독립달성을 위해서는 '조선 민족의 정신 통일과 실력 양성'이 급선무라는데 뜻을 모았고 이를 위한 실천방안으로 대동단을 결성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를 근간으로 전국적 조직을 계획하였는데, 전 협은 동단의 조직과 재정을 총괄하며 동단을 주도했다. 그런데 동년 5월 23일 동단의 선전활동을 주관하던 최익환(崔益煥) 등이 일경에 붙잡히는 바람에, 조직의 일부가 발각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 협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조직을 강화해 가는 한편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를 발행하면서 계속 활동을 펴나갔다.
그러던 중 일제의 포위망이 압축됨에 따라 전 협 등은 동단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그 제1단계로 먼저 동단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동년 10월 10일 상해로 망명케 했다. 그리고 의친왕(義親王)을 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하여 상해 망명을 추진하는 것과 함께 국내에서의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9일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을 실행에 옮겼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만주 안동(安東)까지 넘어갔던 의친왕의 일행이 동년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로써 대동단의 계획은 성사 직전에 무산되었고, 전 협은 동년 11월 19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인하여 1927년 7월 11일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20. 12. 7 경성지방법원)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22∼12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193∼198·20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88·443·445·447면
- 기려수필 267∼26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5·141면
- 고등경찰요사 188·189·253∼25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0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29·230·47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02면
- 박은식전서 상권 635·6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