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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592
성명
한자 沈載仁
이명 靑松忠正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38. 4월 일본(日本) 장기현(長崎縣) 간조농학교(諫早農學校)와 1941. 3월 우도궁고등농림학교(宇都宮高等農林學校) 재학중(在學中) 식민지 정책(植民地政策)항거(抗拒)하고 민족해방(民族解放)독립 정신(獨立精神) 고취(鼓吹)(爲)한 “재일학생단(在日學生團)”을 조직(組織)하고 활동중(活動中) 피체(被逮)되어 징역4년을 받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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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남 고성(固城) 사람이다.

1938년 일본 장기현(長崎縣) 소재 간조농학교(諫早農學校)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들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를 체험하면서 민족적 각성에 이른 그는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4월 장기현 간조시 선월정(船越町) 임우칠(林友七)의 집에서 이상만(李相晩)·박근철(朴根澈) 등과 함께 비밀결사 재일학생단(在日學生團)을 조직하고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농업정책 등에 반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41년 간조농학교를 졸업하고 우도궁(宇都宮)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일본에서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귀국한 동지들을 통해 국내에 조직 거점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 경북 예천(醴泉)의 동지 이상만 등이 밀회를 하고 있던 중 일경에게 노출되어 80여 명의 동지들이 붙잡히자, 그도 연루자로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육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43. 5. 7 大邱地方法院)
  • 固城民族運動(1979. 10. 1 鄕土史料硏究會) 141∼152面
  • 固友會報(1990) 19面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고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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