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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504
성명
한자 金恒圭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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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3 훈격 건국포장
1927년 12월 이래 신간회(新幹會)의 각급 임원을 역임하면서 1929. 12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과 관련한 민중대회(民衆大會)를 계획, 준비하던 중 피체(被逮)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930. 11. 19 신간회(新幹會) 제4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서기장(書記長) (兼) 서무부장(庶務部長)으로 피선되기까지 3년여에 걸쳐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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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27년 2월 홍명희(洪命熹)·안재홍(安在鴻) 등은 민족협동단일전선체로서 신간회(新幹會)를 발족시킨 뒤, 이미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서울청년회계(系)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동전선체적 성격을 띠고서 1926년 7월에 발족해 있던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측과의 합동 교섭을 개시하여, 민흥회측이 신간회로 합류한다는 합의를 얻어내고 성공적인 합동을 기하게 되었다.

이때 민흥회측 대표 5인 중의 1인이던 그는 신간회로 합류한 뒤 1927년 12월 신간회 경성지회(京城支會)의 서무부 총무간사로, 1929년 7월 중앙상무위원과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29년 12월 그는 신간회의 다른 간부들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을 옹호, 지원하기 위한 민중대회를 서울 안국동(安國洞)에서 개최키로 결정하여 행사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던 중 일경의 사전 검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1930년 11월 신간회 제4회 중앙집행위원회 석상에서 서기장(書記長) 겸 서무부장에 임명되어 1931년 2월에 신간회가 해소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간회 해소론을 반대하고 조직을 보위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5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3집 10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0권 76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301·313·340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63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585면
  • 동아일보(1927. 12. 18)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항규 - 서울 광주학생운동
본문
1881년 11월 11일 서울 계동(桂洞, 현 종로구 계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에 김좌진, 김홍진과 함께 단발을 했다고 한다. 한성법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였다가 1921년 귀국하였다고 한다. 김좌진 사망 시에 김좌진의 지우知友로서 회견하기도 하였다.1925년 잡지 민생사(民生社)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6년 ‘민족적 단일전선’을 표방하면서 발기한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에서 조직부장을 맡았다. 조선민흥회와 민족유일당을 추구하던 신간회(新幹會)와의 통합 과정에서 김횡진(金宖鎭)등과 함께 조선민흥회의 협상 대표로 활동하였다. 그 결과 조선민흥회가 신간회에 합류하는 형태로 합의를 하였다.1927년 2월 신간회 창립준비위원 12인에 선거되어 활동하였고, 1927년 12월 10일 신간회 경성지회 제2차 정기대회가 천도교당에서 개최되어 임원이 개편되었다. 여기서 회장으로 유진태(兪鎭泰), 부회장과 간사로는 허헌(許憲)과 홍기문(洪起文)이 선정되었고, 신석우(申錫雨)와 함께 대표회원으로 선정되었다. 12월 14일 신간회 경성지회는 제1회 간사회를 개최하고 부서와 책임자를 선정하였는데, 여기서 서무부(庶務部) 총무간사로 선정되어 민족운동을 전개해 갔다.1929년 1월 19~20일 양일간에 걸쳐 신간회 경성지회 제3회 임시대회가 열렸다. 기존의 신간회 경성지회에 문제 제기를 한 사람들에 의해 전형위원 선거방식이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바뀌어서 선거가 진행되었다. 이 대회의 결과 전형위원을 비롯한 대표회원, 간사, 총무간사, 본부 간사를 맡았다.1929년 7월 4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회가 중앙청년회관에서 개최되어 중앙상무위원 12명을 선정하고 각 부서를 조직하였다. 여기서 홍명희(洪命憙)·김동선(金東鮮)·박문희(朴文禧)·이주연(李周淵)·이춘숙(李春塾)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조직부 부장이 되어 신간회를 이끌어 갔다.1929년 11월 3일과 12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소식과 일제 경찰이 학생을 야만적으로 진압하고 있다는 소식이 신간회에 전해졌다. 이에 신간회 간부들은 광주학생운동을 전민족적 민중운동을 전개할 기회로 삼았다. 우선 이들은 광주학생들의 피해상과 운동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중앙집행위원장 허헌과 재무부장 김병로, 서기장 황상규(黃尙奎)를 광주에 파견하였다. 이들이 광주에서 진상을 파악하고 돌아온 후 개최된 신간회 간부회에서 ‘광주사실 보고대회’를 개최하여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전국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조선총독부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송진우·한용운(韓龍雲)·홍명희·조병옥 등과 함께 이관용의 집에 비밀리에 모여 민중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서를 본떠서 민중선언서를 발표하여 광주학생운동의 전말과 일제 통치의 잔학상을 전민족에게 알리기로 결의하였다.한용운 등 신간회 간부들은 12월 13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안국동, 종로 네거리, 단성사 앞, 용산, 영등포 등지에서 민중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일본 경찰에 구금한 한인 학생들을 무조건 석방, 경찰의 학교 유린을 배격, 포악한 경찰정치 배격 등의 주장이 담겨져 있는 결의문을 배포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민중대회 개최 당일에 일본 경찰들은 2중, 3중으로 신간회 본부를 에워싸고 간부들을 잡아 가뒀다. 이 과정에서 권동진 등과 함께 붙잡혀 경찰에 압송되었다. 12월 24일 이관용 등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예심에서 면소 처분을 내려 형무소에서 나왔다.1930년 11월 19일 신간회 제4회 중앙집행위원회 간부 선임이 있었다. 여기서 중앙집행위원장 김병로와 함께 서기장 겸 서무부장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선정된 임원에 대한 사회주의 진영의 인사들은 강한 불만을 표출하면서 신간회 해소를 제기하였다. 신간회 중앙과 지회 임원들은 5월 16일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해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신간회가 해소되자 더 이상의 활동에 나서지 않았다. 1941년 일제가 침략 전쟁을 위해 만든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해방 이후 1946년 통일정권촉성회에서 활동하였고, 1947년 삼일운동기념준비위원회 위원장, 근로인민당 정치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12월 13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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