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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391
성명
한자 尹琦燮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89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9년 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0년초(年初) 신흥무관학교 교장(新興武官學校校長)으로 독립군(獨立軍)양성(養成)하였으며, 1919년 4월 부민단(扶民團) 대표(代表)임정(臨政)파견(派遣)이래(以來) 인성학교장(仁成學校長), 임정 국무위원(臨政國務委員), 7(代) 의정원의장(議政院議長), 협성회 단장(協成會團長),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대표(代表)등으로 광복시(光復時)까지 독립운동(獨立運動)기여(寄與)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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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경기 장단(長湍) 사람이다. 1908년 안창호(安昌浩)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진력을 다하였다. 1912년 부민단(扶民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부민단의 대표로 임시정부에 파견하였다. 1920년 상해에서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교관과, 임시정부군무부(臨時政府軍務部), 임시편집위원장(臨時編輯委員長), 상해거류민단(上海居留民團) 본구역의 위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1년 5월 중한국민호조사총사(中韓國民互助社總社)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7월에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협성회(協成會)에 가입하였으며, 우리말 사용의 장려를 위한 연설회와 강연회를 통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즉 "일본에 의해 우리말이 전멸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던중의 여가에는 반드시 우리말을 익히도록 하라"는 요지의 강연을 7월 5일부터 시작하여 8월말까지 실시하였다. 1921년 11월 임시의정원 의원 25명과 연서로 독립청원을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들에게 발송하였다. 1923년 5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상해에서 조직된 협성회(協成會)의 단장으로 단원 150명과 임시정부를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1924년 2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어 독립운동의 추진책을 강구하였고, 1926년 12월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원(國務員)에 선임되어 1935년까지 군무장(軍務長)등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3월 한국의 독립을 위한 혁명을 완수한다는 목적하에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4년 2월 한국혁명당 대표로 민족단체의 합류를 추진하여 1935년 7월에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였고, 1936년 2월에는 민족혁명당의 당보부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3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부차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무장독립운동비사 31·51·53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03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33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3권 424·47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42·143·475·513·532·649·743면
  • 국사대사전 상권 105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5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64·74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18·235·420·439·446·495·519·520·536·543·600·601·618·645·751·752·763·766·805·806·823·826·827·843·866·87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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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윤기섭 자 : 중규(仲珪), 호 : 규운(虯雲) 경기 파주 -
본문
1887년 4월 4일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주내면(州內面, 현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坡州里) 마산동(馬山洞)에서 출생하였다. 본적은 경기도 장단(長湍)이다. 자는 중규(仲珪), 호는 규운(虯雲)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대대로 과거급제자들을 배출한 조선말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다. 백사공(白沙公) 훤(喧)의 12세손인 한말의 유학자 기영(耆榮)과 합천(陜川) 이씨(李氏) 사이의 2남 3녀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강원도 철원의 부호이며 문장가였던 박초양(朴楚陽)에게 의탁하였고 그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909년 서울 보성학교 제1회로 수석 졸업하였다. 보성학교 졸업 후 교육사업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평북 정주의 명문 사립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애국계몽서적을 교재로 활용하여 신학문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한편 후학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진력하였다. 1909년 신민회(新民會)에도 가입하여 자주독립, 민중계몽, 민권신장 등의 민족운동에도 투신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과 안창호(安昌浩) 등이 창립한 신민회는 한말애국계몽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는 가장 강력한 비밀결사였다. 민중계몽 연설회에 많이 참여하여 대중을 감동시키는 명연사로 활약하였다. 또한 신민회 산하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한성연회에서도 의사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한국을 식민지로 병탄한 일제가 민족운동을 괴멸시키고자 날조한 1911년 2월 ‘안명근사건’과 ‘105인사건’으로 이승훈(李昇薰) 등이 구속된 후 오산학교는 운영상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오산학교에서의 교사 경험은 후일 신흥무관학교 및 인성학교에서 교육구국운동을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1911년 8월 신민회가 앞서 수립한 국외독립운동 기지건설운동의 방략에 따라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하였다. 독립운동과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이란 독립운동 및 독립군의 기본 역량 또는 토대를 조성하고 배양하는 기지를 건설하는 운동을 가리킨다. 삼원보는 신민회계열이 정착하면서 서간도 독립운동과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삼원보에서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한인자치기관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는데 이 지역 한국독립운동단체의 효시였다. 경학사 산하에 무관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하는데 참여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신흥(新興)이란 신민회의 ‘신(新)’ 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라는 의미를 살려 ‘흥(興)’ 자를 붙인 것이다. 신민회를 강조한 것은 해외 독립운동 기지 설치와 무관학교 창설안이 신민회에서 처음 발의되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신흥무관학교의 학감 및 교장으로 역임하면서 수많은 군사인재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1913년 3월 신흥무관학교 교장이었던 여준(呂準)과 더불어 신흥무관학교 후원 조직이자 혁명결사였던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다음해부터 2년간 지속된 대흉작, 학생 피살 사건 등이 발생하여 이회영(李會榮), 이동녕, 이시영 등이 떠나자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는 시련에 봉착하였다. 절망속에서도 일과 외에 황무지를 개간한다든지 원근의 촌락들을 전전하며 구걸하다시피 해서 양식을 마련하며 학교의 명맥을 이어갔다. 1919년 4월 류허(柳河), 퉁화(通化), 싱징(興京), 환런(桓仁), 지안(輯安) 등지의 민족지도자들이 통일된 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종래의 자치기관이었던 부민단(扶民團)을 확대 개편하여 한족회(韓族會)를 설립하였는데, 학무부장을 역임하였다. 무관학교와 한족회의 활동을 병행하던중인 1919년 7월에는 만주지역의 유명한 마적 창장하오(長江好) 일당에 의해 학생들과 함께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한족회 본부의 교섭으로 마적들로부터 풀려날 때까지 약 두 달 동안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였다. 각고의 노력으로 명맥이 유지된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군사인재들은 청산리전투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의 무장투쟁단체, 그외 노령, 중국 관내의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고려혁명군, 의열단, 한국광복군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0년 2월 9일 3 ・ 1운동 이후 왕성해진 독립 열기를 독립전쟁으로 수렴하기 위해 서간도 삼원보 남산에서 임시국민대회를 발기하였다. 당일 임시회장에 선출되어 독립전쟁을 호소하고 임시정부에 대해 독립전쟁을 위한 재정 지원 요청을 위하여 이진산(李震山)과 함께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월 말경 서간도를 떠나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1920년 2월 말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비롯한 각계 인사를 방문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3월 3일 당시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안창호를 방문하고 서간도의 전반적인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3월초 정식으로 임시의정원에 등단하여 이진산, 왕삼덕(王三德) 등과 함께 연명으로 ‘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하였다. 내용은 임시정부 군사기관을 만주와 연해주로 옮기고 적어도 만주에서 보병 10개 내지 20개 연대를 편성 훈련하여 금년 내에 혈전을 개시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임시정부 내에서 독립전쟁에 대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나아가 청산리전투 등 간도지역에서 독립전쟁이 활성화되는데 기여하였다. 1920년 4월 말 임시정부 국무원의 결정에 따라 안정근(安定根), 왕삼덕, 조상섭(趙尙燮), 이진산과 함께 간도지역 시찰원으로 선임, 파견되었다. 시찰원은 서북 간도지역의 독립군 단체 현황에 대한 조사와 해당지역에 독립전쟁을 대비하여 속성장교 양성 군관학교의 설립 ・ 운영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1921년 2월경 일본군의 대대적인 독립군 ‘탄압’과 청산리전투 등 일련의 독립전쟁을 목격한 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귀환하였다. 이 무렵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 및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였다. 임시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의 탄압으로 파괴되어 침체하기 시작하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자는 주장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21년 3월 정국의 조속한 정상화를 위해 상하이의 독립운동가 39인과 연명으로 임시정부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해 4월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자 조완구(趙琬九)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김규식 ・ 여운형 ・ 신익희, 중국인 우산(吳山) 등이 창립한 중한국민호조사(中韓國民互助社)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임시의정원 의원 25명과 연서로 독립청원을 태평양회의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들에게 발송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이동휘(李東輝)가 이끌던 상하이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1921년부터 기능이 침체된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불거진 국민대표회의 개최 논의는 뚜렷한 결론을 보지 못한 채 개최 자체가 지연되었다. 1922년 10월 임시정부의 장기적인 대일전쟁 준비를 위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창설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세력이 외교방략의 한계를 인식하고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대비하고자 향후 10개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고 백만원 이상의 전비를 조성한다는 목표로 노병회를 결성한 것이다. 노병회의 교육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보병조전(步兵操典)』이라는 군사교육서를 발간하여 청년들의 군사교육에 활용하였다. 1922년 상하이지역 한인 자제를 위한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의 학감으로 초빙되었다. 주로 한국 역사와 국어를 담당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임시정부가 침체된 시기인 1923년 4월 경 임시의정원 제7대 의장에 선출되어 1924년 3월까지 임시의정원을 이끌었다. 이후에도 의정 활동을 이어가 단일 대당인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사면하는 1935년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한편 국민대표회의가 성과없이 결렬된 후 임시정부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12월 14일 임시정부의 국무원 및 내무장에 선임되었다. 12월 23일 임시의정원에서 이규홍, 김철, 정원, 김붕준 등과 함께 헌법기초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이 해에 김구 내각에 이규홍, 김철 등과 함께 입각하여 선전을 책임지고 활동하였다. 1927년 1월 12일 제3차 개헌안을 임시의정원 회의에 발의하였으나 부결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독립운동전선에서 유일당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촉성회의 집행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촉성회연합회의 활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념 및 노선을 달리하는 세력들이 혼재해 있었고, 유일당운동에 참여한 각 세력의 의도와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1929년 10월 상하이촉성회가 해체되었다. 좌파세력은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라는 별도의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후 우익세력도 임시정부의 옹호 ・ 유지를 목적으로 세력을 결집,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이때 한국독립당의 창당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국독립당에서의 활동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한국독립당을 나온 후에 새로운 독립운동정당을 결성하였다. 1932년 초 난징(南京)에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과는 거리를 두고 있던 성주식(成周寔), 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조직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한국혁명당은 상하이 홍커우공원의 윤봉길의거 직후 일경의 추적을 피해 활동근거지를 난징南京으로 옮겼다. 한국혁명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만주의 동북의용군 지원활동을 펼치고있던 중국인 주칭란(朱慶欄)과 교섭하여 중한연합의용군을 조직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독립운동정당 활동과는 별도로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유지하여 1933년 3월 22일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장에 선임되었다. 다음해까지 항저우(杭州)에서 열리고있던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회의 및 임시의정원 회의에도 계속 참여하였다. 동시에 난징에서 독립운동정당 통합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우선 이끌고 있던 한국혁명당은 홍진 등의 재만 한국독립당과 제휴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하고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932년 10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 관내지역 각 세력의 통합논의를 거쳐 마침내 1935년 난징에서 단일대당이 창당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원봉 등과 협력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비록 김구 세력이 불참하는 한계가 있었지만 민족혁명당은 당시로서는 관내지역 단일대당으로 손색이 없었다. 신당에서 중앙집행위원, 훈련부 부장 등 주로 군사훈련 방면에서 중국측과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7년 11월 14일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민족혁명당 구성원들과 가족들을 인솔하여 난징을 탈출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우한(武漢)에 도착한 민족혁명당 대가족은 우한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 등 일부는 우한에 남아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에 대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원봉과 노선을 달리한 당 간부들과 함께 민족혁명당 대가족을 이끌고 충칭(重慶)으로 가서 튼튼한 후방 근거지를 수립하고자 했다. 1938년 3월 13일에 국민당정부의 수도인 충칭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 충칭에서 민족혁명당 충칭 구당부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1941년 6월에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참여를 당론으로 결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1941년 10월 14일 임시의정원 경기도의원으로 보선되었다. 하지만 보선이 적법한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한국독립당의 이의제기로 등원은 성사되지 못했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의 발발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 중국 국민당의 권유, 전선 단일화를 위한 내부적 요구 등을 수렴하여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2년 1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삼일절 기념행사 거행을 위한 삼일절기념주비위원회 주석으로 피선되었다. 그해 8월 20일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에 선임되었고, 1943년 군무부차장에 취임하여 중국정부가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하던 이른바 ‘한국광복군 행동9개준승’의 철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6월 1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생활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가 및 그 권속의 생활에 관한 일들을 관장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에도 생활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교민들의 귀국을 위한 일들을 처리하였으며 1946년 4월말에 귀국하였다. 환국 후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족혁명당, 민족자주연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1950년 5월 30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6 ・ 25전쟁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1959년 2월 27일 향년 73세로 북한에서 서거하였다. 일제의 한국 강제합병 이전의 신민회부터 독립혈전을 주장한 무장투쟁정신은 신흥무관학교의 군사인재양성 활동으로 이어졌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서간도 대표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군무장,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임시정부의 군사노선과 의회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놓았던 독립운동가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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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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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조형물 항일독립운동기념비 경기도 파주시
2 비석 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선생 기념비 서울특별시 은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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