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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390
성명
한자 趙琬九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89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11년 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경술국치 후(庚戌國恥後) 노령(露領)으로 망명(亡命)하여 동지사(同志社)결성(結成)하고 활동(活動)하다가 1919년 3.1운동후(運動後) 상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樹立)참여(參與)이래(以來) 임시의정원의원(臨時議政院議員), 노동총판(勞動總辦), 내무장(內務長), 재무부장(財務部長)국무위원(國務委員)으로 광복시(光復時)까지 임정(臨政)을 이끌어 온 지도자(指導者)의 한사람으로서 현저(顯著)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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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서울 종로(鐘路)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내무주사직을 사직하고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간도(間島) 용정(龍井)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동지사(同志社)를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김동삼(金東三)·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상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12월 상해의 대한인거류민단 의사회(大韓人居留民團議事會) 의원에 선출되고, 1923년에는 동회의 의장을 맡았으며, 1921년 5월에는 임시정부의 내무차장에 임명되었다. 1924년 5월 임시정부의 노동총판(勞動總辦)에 임명되어, 1935년 광복진선의 결성으로 남경(南京)에서 전단과 표어 등을 살포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창군식에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대표하여 참석하고 '군인의 사명의 중요성과 군사작전상 성공할 수 있는 신념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낭독하여 광복군의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13면
  • 기려수필 247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17·77·94·142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제1집 237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제2집 4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47·14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33·51·23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29·29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조완구 - 서울 계동 -
본문
1881년 3월 20일[음] 서울 계동에서 부친 조동필(趙東弼)과 모친 안동 김씨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중담(仲淡), 호는 우천(藕泉)이다. 철종 대에 안동김씨에 맞섰던 조선후기 세도가문 출신으로, 할아버지 봉하(鳳夏), 큰아버지 동석(東奭), 아버지 모두 이조판서를 지낸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 15세 때인 1895년 동갑인 예조판서 홍승목(洪承穆)의 장녀 홍정식(洪貞植)과 결혼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899년 12월 20일 19세 때 효릉(孝陵)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이틀 뒤인 22일 면관되었다. 1902년 8월 17일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가 27일 면직되었고, 다음날 대한제국 내부주사에 임명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와 자결이 이어지는 가운데, 11월 30일 시종무관장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그날 밤 조병세 ・ 심상훈 등 30여 명과 표훈원에 모여 을사늑약의 체결을 반대하는 항의 시위를 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906년 12월 13일 문헌비고교정위원(文獻備考矯正委員)에 임명되었고, 1907년 8월에는 양구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사직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1907년 1월 지석영(池錫永) 등과 함께 국문 보급을 목적으로 국문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단체인 기호흥학회 창립에 참가하여, 평의원에 선출되어 각지를 돌며 교육진흥을 위한 강연과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1908년 8월에는 제국신문찬성회를 조직하여 통감부의 간섭과 탄압으로 경영이 어려워진 제국신문의 구독 확대 운동을 벌였다. 1909년 2월 26일 종로청년회관에서 열린 국민연설회에서 '여론을 무시한 결과'라는 연설을 통해, 순종의 서순西巡 과정에서 있었던 송병준(宋秉畯)의 불경행위(不敬行爲)를 알고도 모른 체하는 무능한 내각을 질타하였다. 1909년 9월 병합 직전 일제가 신기선(申箕善) 등을 앞세워 대동학회를 조직하여 유림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공작을 벌이자, 이에 대응하여 박은식(朴殷植) ・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민족종교로 대동교를 창건하였다. 전례부장(典禮部長)이 되어 대동교의 포교 활동에 나서는 등 유교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4월 열린 대동교 평의회에서 교세 확장을 목적으로 함경도로 떠난 총사(總事) 이범규(李範圭)를 대신하여 임시 대판총사로 선정되어 일시 대동교를 총괄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5월 12일 종로청년회관에서 '적자생존'이란 주제로 연설하였고, 6월 19일에는 기호지방 학생친목회를 대상으로 연설하였다. 그러나 대동교는 1910년 8월 강제 병합이 되면서 일제의 탄압으로 조직이 와해되었다. 한편 1909년 1월 을사늑약에 협조한 매국노를 주살하려 했던 나철(羅喆)이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중광(重光)하자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단군교에 입교할 당시 교명(敎名)은 '양(亮)'이었고, 이듬해 대종교 전교사인 시교사(施敎師) 및 대종교규칙기초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했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국외 포교와 교단 유지를 목적으로 북간도 허룽현(和龍縣) 삼도구에 지사를 설치하였고, 1914년에는 총본사를 백두산 북쪽 산 밑에 있는 청파호(靑坡湖) 부근으로 이전하여 만주를 무대로 교세를 크게 넓혔다. 이 무렵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삼남매를 고국에 남겨두고, 대종교 총본사의 이전을 따라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서일(徐一) 등이 대종교도들을 중심으로 비밀 항일 결사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1915년 12월 일제의 대종교 탄압에 격분한 나철이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하자, 총본사 부전리(副典理)로서 나철의 유해를 총본사로 옮기는 유해 봉장의식을 주관하였다. 북간도에서 대종교 계열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17년 러시아령 연해주로 옮겼다. 1917년 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귀화 한인의 자치기관인 고려족 중앙총회가 조직되면서, 그해 10월 김만겸에 이어 기관지 『청구신보(靑丘新報)』의 주필을 맡았다. 고려족중앙총회는 1918년 1월 하바로프스크에서 또 다른 한인단체인 아령한인회(俄領韓人會)와 통합을 결의하고, 귀화 ・ 비귀화 한인이 모두 참여하는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결성하였다. 1919년 1월 강제병합의 무효와 육탄혈전을 선언한 대한독립선언서의 선포에 참여하는 한편, 그해 2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열린 제2회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고, 그해 3월 상설의원을 5명에서 30명으로 늘리면서 이동녕, 조성환 등과 함께 상설의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를 상하이(上海)에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이동녕(李東寧) ・ 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연해주를 떠나 북간도를 거쳐 그해 3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상하이에 온 뒤 대종교 서이도본사(西二道本司)에서 활동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 프랑스조계 하비로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에서 29명의 의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회의에서 국호와 관제를 정하고 국무원을 선출하고 임시헌장을 제정, 선포하여 4월 11일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4월 22일에 열린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당시 이시영 법무총장만이 부임한 상태였기 때문에 행정의 공백을 메우려고 차장제를 폐지하고 위원제를 실시하기로 하면서, 국무원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 12일 임시의정원에서 수석 국무원 위원 자격으로 그 동안 국무원에서 결의한 외교 ・ 재정 등에 대한 시정방침을 밝혔다. 이어 5월에는 임시의정원법에 따라, 각 도별로 임시의정원 의원을 선출하면서 경기도 의원에 선출되었다. 1919년 8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헌법의 개정에 수반하여 임시의정원법의 개정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고일청(高一淸) ・ 장붕(張鵬)과 개정임시의정원법기초특별위원에 선출되어 임시의정원법 개정에 착수하였다. 또 정부에서 작성한 국제연맹제출안건을 심사할 특별위원장에 선출되어 특별위원 장붕 ・ 김병조(金秉祚) ・ 고일청 ・ 유경환(柳璟煥)과 함께 활동하였다. 11월에는 대한적십자사에서 개최한 회원대모집 경쟁회에 31대 대원으로 참여하여 회원 모집에 적극 나섰다. 1920년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기대하며 여운형 등과 함께 공산주의자 그룹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통합정부는 수립되었지만 임시정부가 기대했던 파리강화회의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가운데 안으로 내부 개혁과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문제로 갈등이 깊어지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과 불신임이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 소집론이 제기되었고 이를 계기로 상하이 정국은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기관을 건설하자는 창조파, 임시정부의 현상 유지를 주장하는 정부옹호파로 나뉘어졌다. 이때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반대하는 정부옹호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3월 5일 윤기섭(尹琦燮) 등과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정부패궤운동(政府敗潰運動)'이라고 반발하며 '임시정부 절대지지', NULL현 대통령 이하 국무원 신임', NULL현 시국을 파괴하는 행위 방지'를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어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정부옹호파 인물들과 함께 협성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절대 옹호하고 위임통치청원 문제 등으로 사임 요구를 받던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절대 지지를 주장하였다. 이처럼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두고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1921년 5월 이승만은 워싱턴회의 개최를 구실로 미국으로 떠나버리면서, 법무총장 신규식(申圭植)을 국무총리대리로 임명하고 임시정부의 현상유지를 당부하였는데 이때 새로 구성된 내각에서 내무차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3월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다. 3월 17일 회의에서 부의장에 당선되었으나 4월 4일 사임하였다. 이 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인민청원안이 제출되자, """"법리상으로 민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있는데 이를 대신할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인민청원안에 반대하였다. 이렇게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두고 갈등이 높아지자 7월 13일 손두환(孫斗煥)이 시국수습을 위한 토의를 목적으로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여러 차례 토론회를 열었는데 7월 28일 조소앙 등 정부옹호파와 함께 시사책진회를 탈퇴하였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 지역 대표 1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그해 5월에 열린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의 헌법 개정을 국민대표회의에 위임하자는 결의가 채택되자, """"국민대표회의와 임시의정원을 병립하는 것은 의회사상 기치대욕(奇恥大辱)이며, 이 결의는 개조파의 주구가 되어 의회의 신성을 모독""""한 것이라는 요지의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정부 옹호파의 강경한 반대와 개조파와 창조파의 의견 대립으로 1923년 6월 폐회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 실패로 상하이 정국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24년 4월 이동녕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하고 임시의정원에 동의를 요구하였다. 이때 노동국총판에 임명되었으나 임시의정원에서 각료 신임동의안이 부결되었다. 6월에 열린 임시의정원에서는 의장과 부의장이 모두 출석하지 않아 일시 임시의장에 선출되어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당시 무정부상태나 마찬가지인 임시정부의 수습을 위한 최대 현안은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과 임시헌법 개정이었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에서는 1925년 3월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이어 4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회제로 개정한 임시헌법을 공포하였다. 임시정부는 이를 통해 서 ・ 북간도의 정의부·참의부·신민부와 연합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정국을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 이런 가운데 정국 수습 방안으로 상하이와 베이징 등 중국 관내를 중심으로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리에 입각한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유일당운동은 독립운동세력이 대단결을 이루어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운영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1927년 3월 임시정부도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는 최고 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고 하여, NULL이당치국(以黨治國)'을 헌법에 명시하였다. 이에 따라 1926년 10월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창립된 이래 상하이, 광둥(廣東), 우한(武漢) 난징(南京)에서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한 촉진회가 조직되었다. 1927년 4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창립에 참가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상하이에서 5개 촉성회의 당적 결합을 위한 전단계로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당시 장제스(蔣介石)의 '반공쿠데타'로 인한 중국 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내부의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929년 10월 상해촉성회가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민족유일당운동도 좌절하고 말았다. 이때 이동녕과 '민족주의 대표'로 해체 성명에 참여하였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한 뒤 이동녕 ・ 안창호 등과 함께 종래의 지방적 파벌투쟁을 청산하고 민족주의 운동전선을 통일한 대독립당 조직을 계획하고 1930년 1월 25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조소앙 등과 함께 당강 ・ 당의 기초위원이 되었고 창당 후에는 총무주임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그해 11월 임시의정원에서는 3년 임기가 만료된 국무위원의 개선에 착수하였는데 이때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내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 직후 임시정부가 저장성(折江省) 항저우(杭州)로 옮기면서 항저우로 갔다. 이듬해 3월 김철, 조소앙과 함께 국무위원을 사임하고 그해 12월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에 보선되었다. 한편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등 중국 관내 독립운동정당의 단체 연합조직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면서 임시정부 해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고 국무위원 7명 가운데 양기탁(梁起鐸)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이처럼 한국독립당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자 송병조(宋秉祚) ・ 차리석(車利錫)과 함께 임시정부 사수를 주장하며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이어서 임시정부 재건에 나서 송병조 등과 그간 임시정부를 떠나 있었던 김구 ・ 이동녕 ・ 이시영(李始榮) 등을 설득하여 1935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구 ・ 이동녕 등과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내무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11월에는 김구 등과 임시정부 여당으로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이사 겸 비서에 선임되어 이동시기 임시정부와 그 여당 역할을 한 한국국민당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중국 관내지역의 민족전선 통일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의 공동명의로 '공동적 강령과 통일적 조직'인 단일당 조직을 천명한 '동지동포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한 뒤, 중국관내지역 민족전선 좌우파를 망라한 7당 회의 및 5당회의가 열리자 엄항섭(嚴恒燮)과 함께 한국국민당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또다시 임시정부의 해체문제 등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1940년 5월에는 한국국민당과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해체하고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민족전선 우파의 통일을 이룬 뒤인 1940년 10월 임시정부는 집단지도체제였던 국무위원회제를 폐지하고 단일지도체제인 주석제를 채택한 임시약헌을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에서는 김구를 주석으로 하는 국무위원을 선출했는데 이때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내무장에 선임되었다. 1942년 11월에는 임시약헌개정위원 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1944년 임시정부의 마지막 헌법 개정을 주도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에 정착한 이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1941년 2월 1일 창간한 『광복』에 창간 축사를, 1942년 6월에는 『한청』 제5호에 「한국임시정부의 분투사략」 등의 글을 게재하는 한편, 1943년 5월에는 조소앙 등과 생계부 생활위원에 선출되어 충칭에 있던 동포들의 생활 안정에 노력하였다. 한편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뒤 중국당국과 군사협정 문제를 교섭하던 중 한국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킨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을 일방적으로 통고함으로써 굴욕적인 협정이라며 불만이 높아졌다. 이에 임시정부에서는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의 시정 내지 취소와 호혜평등의 원칙에 따른 새로운 협정 체결을 요구하였다. 1943년 11월 임시의정원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때, 그는 '행동준승 체결은 매국행위이고 굶어죽을 각오를 하고 취소하자'고 주장하였다. 임시정부의 새로운 협정 체결 요구의 결과 1945년 5월 한국광복군을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인정하는 「원조한국광복군판법(援助韓國光復軍辦法)」이 새로 체결되었다. 1944년 4월에는 중국 관내지역의 민족전선 좌우 진영의 합의로 대한민국임시헌장이 공포되었고,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 겸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10월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군사의 최고 통솔권을 가진 통수부 관제를 당연직인 참모총장과 군무부장 외에 국무위원 한 명을 막료로 임명하도록 개정하였는데 통수부 막료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이후 국무위원과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그리고 생계부 생활위원, 통수부막료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고 12월 2일 홍진 ・ 조성환 등과 함께 임정 요인 2진으로 귀국하였다. 31년 만에 조국에 돌아 온 첫 일성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독립운동을 새로 하자""""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신탁통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이듬해 2월 1일 결성된 비상국민회의의 재정위원장과 최고정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어 최고정무위원이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으로 개편되면서 조직부 위원에 임명되었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임명되었으나, 엄항섭과 함께 사퇴하였다. 이후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투쟁위원회에 지도위원으로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 1947년 9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어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남북한을 통한 자유로운 총선거를 주장하며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1948년 들어 남한만의 단독총선거가 현실화되어 가자 김구, 김규식(金奎植) 등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나섰다. 4월 김구와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서울로 돌아온 후 5 ・ 10총선거에는 불참하였다. 1950년 6 ・ 25전쟁이 일어난뒤 납북되어 1954년 10월 27일 용성의 중앙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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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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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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