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중국 서안에 있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에서 특설한 한청반(韓靑班)을 졸업 후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항일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30면
관리번호 | 5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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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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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明鐸 |
이명 | 김명택 | 성별 | 남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본적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90 | 훈격 |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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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에 있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에서 특설한 한청반(韓靑班)을 졸업 후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항일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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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김명탁 | - | 전라남도 무안(務安) |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 2지대 | |
본문 |
1916년 7월 21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박곡면(朴谷面, 후일 몽탄면으로 개칭) 몽강리(夢江里)에서 태어났다.
중국으로 건너간 경위는 알 수 없으며,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 사업을 하여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였다.
1940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시안에 있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들어가 항일 활동을 하였다. 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 11일 충칭(重慶)에서 기존 조직을 재편하고, 11월 18일 본대를 시안으로 이동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 광복군이 창설되자, 1941년 1월 1일 나월환(羅月煥) 대장이 전 대원을 이끌고 합류해 광복군 제5지대(1941.1.1~1942.4.30)로 편입되었다.
광복군 제5지대원이 되어 지대장 나월환, 간부 이하유(李何有)·박기성(朴基成)·김동수(金東洙)·이재현(李在賢, 李海平, 李在斗) 등과 함께 중국군 제34집단군과 연계하여 일본군 후방 지역에서 강제 징병된 한적 사병과 청년 등을 대상으로 광복군 모집 활동과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공작 활동 중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 한청반)에 들어가 간부 훈련을 받았다.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의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해서는 중국군의 협조와 정보가 필요했고, 따라서 중국군 장교의 계급을 가진 공작원들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지공작대는 앞서 시안에 있는 중국 제34집단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내에 한청반을 설치, 운영하고 있었다. 한청반에 입학하여 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제5지대 간부로서 일본군 후방에 침투하여 선전, 연락,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3월 지대장 나월환이 간부들의 내분으로 암살되자, 참모부 훈련처장 송호성(宋虎聲)이 지대장직에 잠시 보임되었다가, 5월 기존의 제1, 2, 5지대를 통폐합하여 제2지대(1942.5.1~1945.8)로 재편성되면서 광복군 총참모부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李範奭)이 지대장으로 정식 임명되었다. 이로써 제2지대는 본부대와 3개의 구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지대가 되었다. 이때 제2지대 간부로서 지대원을 이끌고 대일본 공작 활동을 수행하였다. 이후 지대장 이범석이 제10전구 사령장관 호종민에게 부탁하여 중앙군관학교 제7분교 내에 한청반을 설치, 운영하자 다시 한청반에 들어가 재교육을 받는 등 광복군으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특히 기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온 뒤 6·25전쟁 중인 1950년 8월 1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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