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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5196
성명
한자 金演君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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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애족장
1919년 3·1운동(運動) 이후 1919. 4월 동만주(東滿洲) 왕청(汪淸)에서 방우룡(方雨龍)단장(團長)으로 의민단(義民團)을 조직하고 서무부장(庶務部長), 부단장(副團長)으로 3백여명의 대원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20. 10월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방침에 따라 간도(間島)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등과 연합하여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를 설치하고 그 산하의 간북(墾北) 남부총판부(南部總辦府)에서 참사(參事)활동(活動)하였으며 1927년 간도(間島) 용정(龍井)에서 한인 중심(韓人中心)중정회(中正會)를 조직하여 위원장(委員長)으로 민족 자립(民族自立)을 위해 활동(活動)하였으며 이후 용정(龍井) 해성학교(海星學校) 교원으로 활동(活動)하였고, 1930년 이후 만주(滿洲)에서 교민(僑民)들의 권익보호(權益保護)를 위하여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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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평남 성천(成川) 사람이다.

의민단(義民團)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각처에서 무장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무렵, 천주교인들을 중심으로 왕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 알아하에서 의민단이 조직되었는데, 김연군은 이 때 여기에 가담하여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단장 방우룡(方雨龍), 참모장 김종헌(金鍾憲), 영장(營長) 허 은(許垠), 재정부장 홍 림(洪林) 등이었다.

김연군은 무장대원 300명과 함께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10월 연통제(聯通制) 산하 간북(墾北) 남부총판부(南部總辦府)가 조직되자, 총판(總辦) 구춘선(具春先), 부총판 방우룡 등과 함께 참사(參事)로서 활동하였다.

1927년 간도 용정시(龍井市)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 되자, 우리는 실행을 세우자"라는 목표 아래 중정회(中正會)를 창립하자 위원장에 취임하여, 서무부 김규복(金圭復), 교양부 박윤하(朴潤夏), 재무부 홍석찬(洪錫燦)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 후 김연군은 용정 해성(海星)중학교 교원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교민들의 권익을 위하여 활동하다 1943년 8월 3일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연감 11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373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504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8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01·318·31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29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525면
  • 동아일보(1927. 7. 19)
  • 현대사자료(강덕상) 제27권 22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연군 - 평안남도 성천(成川) -
본문
1889년 10월 7일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성천면(成川面) 하부리(下部里)에서 태어났다. 천주교에 귀의하여 근대식 교육을 받았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3·1운동에 호응하여 같은 천주교 신자인 방우룡(方雨龍)·김종헌(金鍾憲) 등과 북간도 왕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에서 의민단(義民團)을 창설하고, 부단장을 맡았다. 의민단은 룽징촌(龍井村)의 상부지(商埠地)를 비롯한 간도 전역을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왕칭현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유럽제 무기를 반입하였다. 1920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간도에 간북(墾北) 남부총판과 북부총판을 설치하자, 간북남부총판의 참사(參事)로서 무장투쟁 역량을 결집하는 데 진력하였다.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대첩에 참전한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북만주 닝안현(寧安縣)의 닝구타(寧古塔)에 은거하였고, 1921년에는 김좌진(金佐鎭)·서일(徐一)·방우룡 등과 한반도 내 일본군 시설을 공격하기 위한 폭탄을 제조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1923년 2월 12일 한인 청년이 중국인 경관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약연(金躍淵)·윤화수(尹和洙)를 비롯한 한인 사회 지도자들과 함께 중국 관헌 측에 재발 방지를 요구하였고, 2월 26일부터 2월 28일까지 개최된 간도주민대회에서 집행위원 5인 중 1명으로 선출되어, 재만 한인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또 룽징촌 내에서 독자적인 행정·치안 체계를 가진 조선민단(朝鮮民團) 설립을 추진하여, 집행위원의 일원으로 일제 총영사관과 중국 옌지도윤(延吉都尹)을 상대로 조선민단의 장정(章程) 승인을 설득하였으나, 통치권의 약화를 우려한 중국과 일본 측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동시에 재만 한인들의 실력 양성과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해성중학교(海星中學校) 교사 신분으로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재만 한인들의 계몽 및 복리 증진 사업에 투신하였고, 1927년에는 김규복(金圭復)·박윤하(朴潤夏)·홍석찬(洪錫燦) 등과 계몽단체인 중정회(中正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을 맡았다. 간도 한인사회와 가톨릭 신자 모임의 원로로 활동하던 중 1943년 8월 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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