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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516
성명
한자 金萬秀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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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24년 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경술합방(庚戌合邦)을 당하자 친족 김지섭(金祉燮), 김재봉(金在鳳), 김응섭(金應燮)과 같이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만주(滿洲)로 탈출하여 동지 유기동(柳基東), 최병호(崔炳鎬)와 함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하여 맹활동.

1924년 4월 7일 임무를 띠고 하얼빈에 체류중 일경에 발각 교전중 하얼빈 일본총영사(日本總領事) 국길정보(國吉精保), 형사부장(刑事部長) 송도(松島) 등 10여 명을 사살하고 다음 날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다.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298, 428.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271
조선일보(朝鮮日報)(1924년 4월 16일)
매일신보(每日申報)(1924년 4월 12일)
공적서(功績書)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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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김지섭(金祉燮)·김재봉(金在鳳)·김응섭(金應燮) 등과 같이 항일 투쟁을 결의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동지 유기동(柳基東)·최병호(崔炳鎬)와 함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7일에는 참의부원(參議府員)으로서 임무를 띠고 하얼빈(哈爾濱)에 체류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자 일영사(日領事) 국길정보(國吉精保) 형사부장 송도(松島) 등 10여 명을 사살하고 최병호(崔炳鎬)·유기동(柳基東)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98·428·55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46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55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3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만수 자 : 회일(會一) 경상북도 안동(安東) -
본문
1892년 12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북면(豊北面) 오미동(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김낙운(金洛雲)과 분성 이씨盆城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다른 자료에 의하면 1894년 11월 15일에 태어났다는 의견도 있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字)는 회일(會一)이다. 한편 1892년 12월 25일에 태어났다는 의견도 있다. 손 위 친족이면서 지사의 길로 나가던 김응섭(金應燮)·김지섭(金祉燮)·김재봉(金在鳳)의 훈도와 감화를 어릴 적부터 받고 자랐으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비분강개하던 끝에 1913년 만주로 건너갔다. 1918년 봄에 안동 출신 망명지사 이상룡(李相龍)이 지린성(吉林省) 화뎬현(樺甸縣)에 둔전(屯田) 형태의 병영인 길남장(吉南庄)을 설치하고 농병(農兵)이 될 20세 이상의 장정들을 모집하자 선뜻 응하여 군사가 되어서 지도받았다. 이때 “키는 작으나 꼼꼼하고 날쌔며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길남장에서 몇 달 지낸 후 이상룡의 곁을 떠났다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고 이상룡이 독판(督辦)으로 취임한 때인 1919년 가을에 다시 찾아갔다. 1922년 서로군정서 안에 헌병대가 조직되자 그 대원이 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1923년에 헌병대원으로 들어온 최병호(崔炳鎬)와 막역한 동지가 되었다. 그 무렵 하얼빈(哈爾濱) 일본 총영사관의 고등정탐부장인 구니요시 세이호國吉精保 경부보(警部補)와 형사부장 마쓰시마(松島)가 창춘(長春)·하얼빈 일대의 한인들을 무단히 탄압하고 함부로 해쳐서 악명이 높았다. 최병호와 함께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여 구니요시 등을 암살 응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동지 10여 명을 모아서 건국청년모험단(建國靑年冒險團)을 결성하였다. 1923년 12월 초에 하얼빈으로 가서, 시 외곽 남십팔도가(南十八道街)의 중국인 집에 거처를 정하고 거사 기회를 엿보았다. 1924년 4월 초 우연히 재회한 길남장 시절 친구인 류기동(柳基東)을 거사 동지로 합류시켰다. 이러한 동향이 일본 경찰 정보망에 탐지되어 4월 8일 자정 무렵 구니요시와 9명의 순사에게 거처가 포위되었다. 일본 총영사의 압력에 굴하고 만 하얼빈도(道) 교섭서(交涉署)의 요구로 빈장진수사(濱江鎭守使) 장짜오탕(張召棠)이 보낸 중국군 보(步)·기병(騎兵) 각 1개 중대와 경청(警廳) 특경대장 장쩐동(張鎭東) 인솔 하에 출동한 40명의 경관대에 의해서도 겹으로 포위되었다. 장쩐동이 대화를 청하며 신원을 묻자 한국독립군 일원임을 밝히고 “왜적과 사생결단의 승부를 겨루려 한다”라고 말하였다. 장쩐동이 “조용히 잡혀주면 국사범(國事犯)으로 대우하고 일본에 인도하지 않겠다”라고 회유하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그냥 물러가주기를 요구하였다. 대화를 끝내고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구니요시가 순사 2명을 데리고 총을 겨누며 쳐들어왔다. 재빨리 권총으로 구니요시를 쏴서 가슴을 명중시켜 죽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뒤로 물러나고 일본 총영사가 1인당 300원의 현상금을 걸고 중국 군경의 적극적인 진압을 유도하니, 수백 발의 총탄이 난사되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권총으로 응사하며 날이 밝을 때까지 대치하였다. 4월 29일 오후 1시경, 중국 경찰이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부수고 구멍을 내어 5~6개의 폭탄을 집안으로 던짐과 동시에 사방에서 총탄을 퍼부었다. 그런 상황에서 5분 정도 총격전을 벌이다 탄환이 떨어져가자 가슴에 총을 쏘아 자결하였다. 시신은 하얼빈 적십자회가 수습하여 한인 공동묘지에 묻어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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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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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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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소 오미 광복운동 기념공원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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