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27년 11월 전라남도 광주(光州)의 광주공립농업학교에 재학 중 사회과학 연구모임을 결성하여 민족 독립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는 1926년 결성된 성진회(醒進會)가 1927년 3월 해산한 이후 성진회 회원인 문승수(文升洙)·정동수(鄭東秀)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연구모임이었다.
1928년 6월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평소 민족차별적 언동을 일삼던 일본인 교사를 몰아내기 위해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학교측이 유상걸을 포함한 주도학생 12명을 퇴학시키는 등 비교육적 처사로 일관하자 학생들은 폐교를 각오하고 결속을 강화하였다. 송성수(宋星秀)·김재룡(金在龍) 등 학우들과 맹휴중앙본부를 결성하고 모계부(謀計部), 탐정부(探偵部)를 두어 조직적인 투쟁에 나섰다. 유상걸은 모계부원으로 선임되었다. 유상걸은 “싸우자, 싸우자, 모국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우자. 모국의 생명은 우리들의 활동 여하에 있다”는 격문을 작성하여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또한 ‘식민지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며 일제의 교육정책에 항쟁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28년 9월 2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재학 당시의 사회과학 연구 활동을 이유로 다시 체포되었다.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불복 공소하여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1932년 6월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에서 소작 농민들이 악질 지주를 습격하는 등 시위를 벌인 활동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광주지방법원:1928. 9. 28)
- 예심종결결정서(豫審終結決定書)(광주지방법원:1930. 7. 26)
- 판결문(判決文)(광주지방법원:1930. 10. 27)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31. 6. 13)
- 재소자신분카드(국사편찬위원회)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
- 매일신보(每日申報)(1928. 7. 30, 10. 2, 10. 21, 10. 22)
- 조선일보(朝鮮日報)(1930. 2. 16, 1931. 6. 14)
- 중외일보(中外日報)(1930. 7. 30, 7. 31)
- 동아일보(東亞日報)(1930. 10. 10, 10. 20, 1932. 6. 17)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학적부(學籍簿)(광주공립상업학교)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제13집 902, 1500, 1501, 1619, 1627~1629, 1656~1658, 1662~1710면
- 한국민족해방운동사자료집(김경일, 1993) 제10권 364~368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제9권 490~498, 512, 55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