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39년 전라남도 광주(光州)의 광주서중학교에 입학하여 상급생들의 영향으로 점차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41년에는 학우인 기영도(奇英度)와 일본의 창씨개명, 민족차별 정책 등을 토론하고 비판하며 민족독립만이 해결방안임을 깨달았다. 10월 교내 비밀결사 무등회(無等會)에 가입했다. 무등회는 1938년에 조직되었던 서중독서회(西中讀書會)를 1940년 3월경 확대 개편한 것이다.
이후 박화진(朴和珍) 등의 동지를 규합하고 토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함양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것이므로 지원병제도를 역이용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후 결정적인 시기에 궐기하는 방안 등을 논의했다.
1943년 5월에는 학생들의 일본어 상용 반대활동을 벌였다. 4학년생 일부가 이들의 활동에 반대하자 구타 응징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동했다. 7월 이러한 활동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과 ‘상해(傷害)’로 징역 단기 2년 장기 4년을 받았다. 김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4년 12월 11일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判決文)(광주지방법원:1944. 9. 18)
- 광주학생독립운동사(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1974) 86~90, 247~257, 703~7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