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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07
성명
한자 姜金鍾
이명 晉山金鐘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40년 일본(日本) 대판(大阪)에서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를 조직하여 재일동포(在日同胞) 및 학생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활동하다 체포되어 1942년 10월 12일 대판지방재판소(大阪地方裁判所)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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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제주도 제주(濟州) 사람이다.

그는 일본 대판전문학교의 야간부에 재학 중인 1940년 4월에 김봉각(金奉珏)·김병목(金丙穆)·고봉조(高奉朝) 등과 함께 재대판 조선인학생의 단결을 도모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동년 5월 초순, 대판부 소재 김봉각의 집에 모인 이들은 독립운동에 관한 근본방침을 의논하고 먼저 조선인 대중을 상대로 민족의식을 계몽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를 위한 실천단체로서 홍아연구회라는 독서조직을 결성하였다. 동회는 조선독립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연구를 목적한 항일결사였는데 동년 5월 중순에 그 명칭을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로 개칭하였다. 이들은 정치·사상·문예·종교 등 각 방면의 전문연구를 통하여 당시의 국제정세를 면밀히 분석하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한편 연구발표회를 통하여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쌓았다. 이때 그는 사상이론연구부를 책임 맡아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2월 25일 동회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붙잡혔으며, 그는 1942년 10월에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44년 4월 2일 출옥시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42. 10. 12 대판지방재판소)
  • ·재소증명서(대판형무소)
  •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박경식) 제4권 626·627·629·74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755·76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762·763·76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078·1226·130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322·32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금종 호 : 문소(文巢)·소범(素凡), 이명 : 진산금종(晋山金鍾) 전라남도 제주(濟州) -
본문
1917년 12월 27일 전라남도 제주도 제주면(濟州面) 삼양리(三陽里,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동)에서 강모수(姜毛遂)와 한정순(韓貞順)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문소(文巢)·소범(素凡)이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 진산금종(晋山金鍾)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생활에 시달렸다. 사립 화북보통학교에 다니다 어머니를 따라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이사하였다. 12세 때 어머니와 함께 일본 내 한국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오사카(大阪) 이카이노(猪飼)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심상소학교 3학년에 들어갔으나 반년 만에 제주도로 귀향하였고, 삼양보통학교 4학년에 들어가 5학년까지 마쳤다.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가사를 도왔다. 1936년 4월 고학의 뜻을 품고 홀로 오사카로 건너가 점원·신문 배달·핸드백 물림쇠 직공 등의 일을 하면서 오사카 기독교청년회 영어학교, 니혼대학(日本大學) 부설 오사카전문학교 법과 야간부 별과(別科)에서 공부하였다. 1940년 1월 게이한(京阪)상업학교 야간부 3학년에 입학하여 다음해 3월 졸업하였다. 이 무렵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문헌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의무교육제도의 차별, 도항증명서 등 일본 정부의 억압적 조치 및 민족 차별에 반감을 가지고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게 되었다. 오사카전문학교에서 만난 같은 고향 출신 김병목(金丙穆)·한만숙(韓滿淑)·고봉조(高奉朝)·부림전(夫林栓) 등과 교유하였다. 1940년 초 김병목의 소개로 일본생명보험회사에 다니며 긴조(金城) 자물쇠제작소에서 일하던 김봉각(金奉珏)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자주 회합을 열고 ‘한국 독립운동’ 전개 및 그 근본 방침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같은 해 5월 흥아연구회(興亞硏究會)를 조직하여 ‘한국 독립’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 연구회를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로 개칭하였다. 책임부서를 나누어 김봉각이 조직과 자금책, 김병목이 연락책을 맡는 가운데 교육책을 담당하였다. 각자 연구 과목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여 의견을 교환하는 한편, 이를 통해 민족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지식 습득에 노력할 것을 결정하였다. 주로 마르크스주의와 삼민주의를 중심 과제로 삼았고, 각각의 연구 분야로서 정치 이론은 김봉각, 문예와 종교는 김병목, 세계 동향은 고봉조가 담당하였으며, 이때 사상이론 분야를 연구하기로 합의하였다. 1940년 7월까지 4회에 걸친 연구발표회, 1941년 2월 25일 계림동지회 활동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쓰루하시(鶴橋)경찰서에 연행되었다. 1942년 8월 14일 오사카지방재판소 예심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공판에 부쳐졌고, 2달 뒤인 10월 12일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4년 4월 2일 출옥하였다. 감옥에서 불교 관계 서적 및 일본의 근대문학을 읽었고 펄벅의 『대지』를 애독하였다. 출옥 후 누나가 있는 사할린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임남철(林南喆)을 만나 결혼하였다. 1945년 3월 귀국하여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조치원(鳥致院)에 정착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학교 교원과 기자 등을 지냈으며 주로 문예 활동에 진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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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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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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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2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3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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