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 5월 김구 (金九) 와 함께 무력 (武力) 으로 왜적 (倭敵) 을 무찌르고 독립 (獨立) 을 성취 (成就) 하여야 한다는 결의 (決意) 를 다짐하고 만주 심양 (滿洲瀋陽) 으로 가서 관동 연왕 (關東燕王) 이극강아 (李克康阿) 의 지원 (支援) 을 요청 (要請) 하고 1896년에 김이언 (金利彦) 의병진 (義兵陣) 에 가진 (加陣) 하여 초산 (楚山) 위원 (渭原) 등지 (地) 에서 포수 (砲手) 를 모집 (募集) 하고 평북 (平北) 강계 (江界) 고산리 (高山里) 전투 (戰鬪) 에서 승전 (勝戰) 하였으나 강계성 공략 (江界城攻略) 에서 패전 (敗戰) 한 후 (後) 김구 (金九) 와 함께 일인 토전양량 (日人土田讓亮) 을 살해 (殺害) 한후 (後) 은밀 (隱密) 히 귀향 (歸鄕) 하여 은신 (隱身)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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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북 완주(完州) 사람이다.
1895년 5월 김구(金九 : 金昌洙)와 의기투합하여 구국의 방안은 무력으로 일제를 격퇴하는 길 뿐임을 결의하고 중국 심양(瀋陽)으로 가서 관동연왕(關東燕王) 이극강아(李克康阿)에게 원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96년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김구와 함께 가담하여 초산(楚山)·위원(渭原) 등지에서 포수(砲手)를 모집하여 전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강계군(江界郡) 고산리(高山里)를 공격, 무기를 탈취하여 의병들에게 지급하고 강계성을 향해 진격하였으나 이미 수성(守城)이 완벽하여 공성(攻城) 작전에 실패하고 퇴각하던 중 일인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살해하여 김구와 함께 체포령이 내렸으나 무사히 전북 금구(金溝)로 귀향하였다.
그러나 1898년 2월 27일 동학의 접주(接主)로 발령받고 금구 일대에서 활동하다 붙잡혀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海州觀察使署理 金孝益 法部大臣에의 報告書(1896. 6. 30)
- 白凡逸志 60∼66 137·138面
- 路程略記(金元明)
- 東學接主發令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