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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8
성명
한자 金勝文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덕천(德川) 분단(分團)을 조직 일제하에 지하청년운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였고 1921년 5월에는 운동자금 모금(運動資金募金)을 위하여 적극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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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남 덕천(德川) 사람이다. 1919년 평양고보 학생으로 평양의 3·1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당하였다. 1920년 2월 만주에 있는 대한독립단 단장 조맹선(趙孟善)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밀파된 박승엽(朴承燁)과 상의하여 덕천 지역에 대한독립단의 지단을 조직하였다. 그는 서기장의 직책을 맡고 지단장 정진원(丁進源), 부단장 정계록(丁繼綠), 재무감 정붕익(丁鵬翼), 통신부장 이종현(李宗鉉) 등과 함께 독립사상의 고취, 무장대원의 지원, 군자금 모집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5월에는 동 단원(團員)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지시를 받고 김창문(金昌文)·김봉준(金鳳俊) 등으로부터 일금 300원을 모금하여 지단에 전달하고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동년 5월 10일 일경에게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8년부터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언론을 통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93·402·403·404·405면
  • 동아일보(1921. 10. 28)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98·504·522·52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승문 - 평안남도 덕천(德川) -
본문
1900년 7월 17일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성양면(城陽面) 금성리(金城里)에서 출생하였다. 평양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당하였다. 2년 후인 1921년 봄,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에 입학하였으나 평양고보 퇴학 사실이 발각되어 다시 퇴학당하고 서울의 중동학교(中東學校)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평양고보를 퇴학당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던 1919년 가을, 재만(在滿) 독립군단(獨立軍團)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특파원 박승엽(朴承燁)이 덕천군에 찾아왔다. 대한독립단은 1910년 전후 만주로 망명한 의병들이 1919년 4월 류허현(柳河縣) 시거우(西溝) 다이셰(大花斜)에서 도만 초기 의병들이 만들었던 단체인 향약계·농무계 등을 통합해서 조직한 독립군단이다. 도총재(都總裁)에는 박장호(朴長浩), 부총재는 백삼규(白三奎) 등이 선임된 대한독립단은 만주 내 조직이 갖추어지자 독립군을 국내로 진입시켜 유격전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 지방조직 구축을 추진하였다. 박승엽이 덕천군에 파견된 것도 국내 조직 구축을 위한 것이었다. 박승엽은 지역의 명망있는 유학자로 알려진 정진원(丁進源)을 만나 덕천에 대한독립단 국내 지단 설립 계획을 말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정진원의 노력으로 대한독립단 덕천지단이 빠른 시간에 성립되었다. 덕천지단 성립 후 서기과장(書記課長)에 임명되었다. 상급학교 4학년까지 다닌 학력이 있어 군자금 모집 요청서, 일제의 관리 또는 친일파들에게 보내는 경고문 작성 등의 업무가 가능하기에 맡겨진 직책이었다. 그 외 지단장 이윤실(李潤實), 부지단장 정계록(丁繼祿), 총무 정진원, 재무감 정붕익(丁鵬翼), 통신부장 서상억(徐尙億) 등이 간부로 선임되었다. 덕천지단이 성립되자 대한독립단도 이 지역에 적극적으로 독립군을 파견해 지단원의 조력을 받아가며 활동을 벌였다. 1920년 봄, 덕천군 일하면(日下面)주재소에 근무하는 일본인 순사부장과 한인 순사가 관내를 순시하다 독립군 파견원의 총을 맞고 일본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한인 순사는 줄행랑을 쳤다. 또한 비슷한 시기 독립군 파견원이 무장 활동을 벌이다 부상당했다. 이에 덕천 지단원들은 정성을 다해 부상당한 독립군을 치료하여 만주로 귀대시켰다. 본부 파견원들의 지원 뿐만 아니라 지단 자체적으로 단원 확충 사업, 독립사상 선전, 군자금 모집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재무감 정봉익은 덕천에 거주하며 현금을 보유할 만한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750원의 자금을 모금하고, 자신도 30원을 보태 780원을 박승엽에게 전해 본부에 납부하도록 하였다. 지단장 이윤실 또한 200원 가까이 자금을 모금하였다. 간부를 비롯한 지단원 모두가 이같이 열심히 독립자금을 모집한 결과, 1920년 한 해 동안 3,000원에 가까운 자금을 모집해 박승엽 및 독립단 파견원 한동진(韓東振) 등에게 건네주며 만주의 본부로 전달하게 하였다. 서기과장의 직책이었으나 다른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군자금 모집에 나서 수백 원을 거두어들이고, 적극적으로 단원 모집 활동도 펼쳤다. 그러나 덕천지단의 이같은 활동은 1921년 5월경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6월 중에 지단원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이 시기 서울에 올라와 중동학교에 재학하던 중, 다른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2년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어 옥고를 겪은 후 1923년 4월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일본 교토(京都)의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경제과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될 무렵에는 동아일보 도쿄지국장(東京支局長)직을 수행하였다. 1951년에는 부통령(副統領) 비서실장, 1967년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興韓化學纖維株式會社)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기도 시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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