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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75
성명
한자 姜治明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광복군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42.10 광복군(光復軍)에 입대 징모처(徵募處) 3분처(分處)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8.15까지 반전 방송(反戰放送) 선전 공작(宣傳工作)에 적극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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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북 창성(昌城) 사람이다.

1941년 9월 일본군에 징발되어 상해 연부대(烟部隊)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던 중 강소성(江蘇省) 무석현(撫錫縣)으로 전속되었다. 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김문호(金文鎬)주임과 접선이 되어 광복군에 입대하여 징모처 제3분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34·235·237·238·44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치명 강정청(姜正淸) 평북 창성(昌盛) -
본문
1911년 3월 5일 평안북도 창성군 동합면(東合面) 이천리(梨川里)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제지회사에 들어가 일하기도 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징모처 제3분처원으로 활동하였다. 제3분처 입대 시기에 대해서는 1941년 3월 1일 이전, 1941년 4월경, 1941년 9월 이후 등 세 가지 설이 전한다. 먼저 1941년 3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소속 징모처 제3분처가 충칭(重慶)에서 발족할 당시 창립위원으로 참여하였다는 설이다. 둘째, 1941년 4월 설은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에 주둔한 중국군 제3전구(戰區) 전시 간부훈련단에서 복무 중, 충칭에서 상라오로 파견을 나와 활동하던 제3분처원에게 포섭되어 동지 김형석(金亨石)·유상공(劉尙功)·유상운(劉尙雲)·유증영(劉增榮)·전복근(全福根) 등과 함께 제3분처에 입대하였다는 것이다. 이즈음 제3전구 특무단에 일본군 포로로 잡혀온 김운경(金雲慶)·이기수(李基洙)·이명식(李明植)·정봉수(鄭逢水)·한진원(韓鎭源) 등 7명의 한인 사병도 제3분처에 입대하였다 한다. 셋째, 1941년 9월 이후라는 설은, 일본군에 징발되어 상하이(上海) 연부대(烟部隊)에서 중국어 통역으로 근무하였으며, 장쑤성(江蘇省) 우씨현(無錫縣)으로 전속되었고, 이후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주임 김문호(金文鎬)와 접선하여 광복군에 입대한 후 제3분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세 가지 설 가운데 어느 설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1941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 9주년을 맞아 제3징모분처 청사에서 중국 측 인사들을 초청하여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기념식을 마치고 제3분처 주임 김문호를 비롯해 김형석·신정숙(申貞淑)·이지일(李志一)·한도명(韓道明) 등과 함께 내빈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선전문·전단·귀순통행증(歸順通行證) 등 각종 인쇄물을 가지고 기차 편으로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에 주둔 중인 중국 제10집단군 총사령부로 떠났다. 이후 제10집단군 총사령부의 협조로 대만의용대(臺灣義勇隊)와 합동 공작을 펼치는 한편, 다시 중국 제5군사령부 소재지로 진출하여 정보 선전 공작, 일본군 포로 심문 및 정보 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2년 5월, 일본군은 4월부터 시작된 미국 공군의 본토 공습에 당황한 나머지 중국군 제3전구 내의 미국 공군기지를 장악하기 위한 소위 ‘절공회전(浙贛會戰, 절공총력전, 1942.5.15~9월 말)’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제11 13군의 병력 9만 6,000여 명과 난징의 친일 정권 왕징웨이(汪精衛)군 10만여 명을 동원, 난징(南京)·쑤저우(蘇州)에서 진화·상라오 지구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5월 27일 일본군은 저장성 난씨현(蘭溪縣)에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동지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군 잠편(暫編) 제13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난씨역까지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러나 전방 방위선이 무너지자, 사단 본부와 함께 이우현(義烏縣)으로 이동하면서도 반전 전단지를 살포하고 야전(野戰) 방송기를 이용하여 왕징웨이군의 귀순을 권고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세를 만회하지 못하자,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 포위망을 탈출하여 진화 지구로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후 전복근(全福根)과 함께 제3전구 정치부 설계위원(設計委員) 펑나이웨이(彭乃瑋)를 도와 절공회전에 참가하였던 일본군 포로들을 심문하였다. 당시 절공회전에 참가하였던 구마모토(熊本) 사단은 한국인 지원병을 가장하고 학살·약탈 등을 자행하여 한·중 양 민족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이간책을 펼쳤다. 따라서 제3전구 정치부와의 협력으로 일본군의 모략과 중상을 폭로하고, 오해와 동요가 없어야 한다는 중국어 성명서를 작성하고, 중국 각 기관에 배포하여 대민 선무공작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한국광복군과 한국독립당 공동명의로, 한·중 친선의 촉구와 한국에 대한 일제 식민지 정책의 내용을 폭로하는 선전문을 인쇄 배포하였고, 또 일본어·한국어로 된 반전 전단과 귀순통행증 등 각종 인쇄물을 다수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후 제3분처 주임 김문호 및 대원 이명식(李明植)·한진원 등과 함께 각종 선전물을 가지고 저장성 톈타이현(天台縣)으로 나가, 그곳에 주둔한 중국의 제1 유격정진군(遊擊挺進軍) 종대(縱隊) 사령부와 합작으로 일선 공작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제3징모처에서도 제3전구 사령부 정치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진화에 주둔한 중국 제10집단군 총사령부와 협조하여 이 작전에 협력하게 되었다. 김문호·전복근·조명(曹明)·조동걸(趙東傑)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한국독립당’, ‘제3전구 정치부’ 등의 명의로 된 반전 전단, 염전(厭戰) 사상 고취 전단, 일군 귀순통행증 등을 화물차로 싣고 야전 방송기 등을 휴대한 채로 진화 지구로 출동하였다. 이곳에서 선전물의 살포, 일선(一線) 방송을 하며, 선전물을 미군 비행대에 공급하여 일본군 점령 지역에 공중 살포하게 하였다. 이때 저장·장시의 운송로를 연결하는 절공(浙贛) 전투에서 중국군이 차츰 무너지기 시작함에 따라 제3전구 사령부가 푸젠성(福建省)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대원들도 중국군을 따라 남쪽의 난핑(南平)까지 이동하면서도 한·중 합작의 힘겨운 일선 공작을 계속하였다. 1942년 10월 1일부로 제3분처는 광복군 총사령부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로 개편되었다. 이로써 제3분처 주임인 김문호는 분대장이 되고, 나머지 인원들은 그 대원이 되었다. 그러나 제3분처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944년 11월, 미 공군의 일본 도쿄 공습 후 상하이 장완(江灣) 비행장 등에 불시착하게 되어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 공군을 구출하는 작전에 참여하였다. 김문호가 미 공군에서 제공하는 비밀 통신문과 공작금을 가지고 분처로 돌아오자, 이강(李剛)·정화암(鄭華岩)·신정숙·전복근 등과 함께 간부 회의를 열고, 공작 업무 수행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였다. 그 결과 비밀 통신 연락 공작은 수년간 상하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여 온 정화암이 현지 임무를 책임지고, 김문호를 일반적인 정보 수집 등을 담당하기로 하여, 주중 미 공군 사령부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함으로써 수용소 소재지에 대한 폭격을 중지하게 하는 등 한·미 합작의 성과를 거두었다. 1945년 3월, 분대장 김문호 및 전복근·최일영(崔日英)·조동걸 등의 대원과 함께 전선 각지에 파견 공작 중인 대원들을 순방 격려하였다. 특히 절서(浙西) 지구에 중점을 두고 중국 제1유격정진군 종대 및 미 공군 파견대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한·중, 한·미 합동 공작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징모 제3분처의 이러한 활동은 중국 측의 관심을 유도하였으며, 중국 군사위원회에서는 제3전구 사령장관 꾸주통(顧祝同)에게 한국광복군의 반정(反正) 공작에 협조하라는 명령을 하게 되었다. 이에 꾸주통 사령 장관은 다시 제2유격정진군 사령관 겸 제5 군장 타오광(陶廣)에게 한국광복군에 대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명령하니, 여기서 한·중 양국 현지 장병들은 협동 합작으로 더 유리한 대일 항전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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